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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요일 2:7-11
성경본문내용 (7)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8)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9)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10)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11)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강설날짜 2007-12-16

2007년 12월 16일 설교


새계명을 쓰는 이유


말씀:요한일서 2:7-11

우리는 지난주에 대언자 예수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는 대언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빛 되신 하나님과 사귐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언자 되신 예수님을 아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습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과 온전한 사귐을 이루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온전한 사귐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새 계명에 순종하여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을 이루어가는 비결을 배우고자 합니다.

7-8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희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고 합니다. 사도요한은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신 옛 계명이라고 합니다. 이 옛 계명은 너희가 이미 들은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쓴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입니까? 지금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새 계명에 대하여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용상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전에 들었던 그 말씀을 다시 말한다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쓰는 이유는 이것이 참된 것이며,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이미 비췄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새 계명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3:34-35절에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그러면 이런 계명이 구약에는 없었습니까? 구약에서도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19:18절에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구약, 정말 옛 계명에도 있는 이런 형제 사랑의 말씀을 지키라고 하면 될 텐데 왜 예수님은 새 계명을 말한다고 하셨습니까? 내용은 같은데 그 계명을 성취하는 방법에서 전혀 다르기에 새 계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에스겔 34:1-2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양을 돌보아야 할 목자들이 오히려 양을 잡아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자와 양 사이만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양과 양 사이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34:20-21절을 보면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살찐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로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고 했습니다. 목자들이 살진 양을 잡아먹고 양들 사이에서는 또 힘 있는 양들이 약한 양들을 어깨로 밀치고 뿔로 받아 흩어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은 이스라엘의 실상이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양떼를 친히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34:22-24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않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합니다. 한 목자 다윗을 세워서 그들 중에 왕으로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약속을 따라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새 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 새 언약 안에서 주어지는 계명이 새 계명인 것입니다. 이 새 계명은 옛 계명과 내용면에서 같습니다만 그 성취의 면에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고서 이웃을 사랑하느라고 구제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함이었고 자기들의 의를 내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로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구약에서 새 언약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새 언약은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안 되는 것을 확인시키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됩니다 오직 주의 신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은 하나님의 신을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주시는 방식으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하셨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시는 그 앞뒤의 내용을 보면 유월절 만찬을 행하시는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만찬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하여 그 자리에서 나갔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13:31-32절입니다.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여기서 이 영광이 무슨 영광입니까?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것까지를 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광을 받으시는 자리에서 자기 피로 이루어내신 새 언약의 결과물을 자기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2:33절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베드로 사도가 이 말씀을 전하면서 다윗의 이야기를 합니다. 다윗이 예언한 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서에서도 다윗 같은 목자를 세워 자기 양떼를 먹이는 왕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겔 34:24). 왜 이렇게 길게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8절 때문입니다. 8절을 다시 보면 새 계명을 쓰는데 이 계명이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되다고 합니다. 여기서 저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새 계명이 예수님에게 참되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새 계명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새 계명을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정말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셔서 자기의 살과 피를 주셔서 사랑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말씀은 이 새 계명이 예수님에게만 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도 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 새 계명을 지키고 있습니까?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십니까? 물론 여기서 내 이웃을 예수 믿는 형제자매 곧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이라고 봅니다. 이들을 과연 내 몸처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새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새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직 어두움 가운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직 어두움 가운데 있다는 것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많은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지켜야 빛 가운데 행하며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 이제부터 새 계명을 지켜야 하는데 어떻게 지키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실천방안들을 다시 만들어 냅니다. 구약에서는 지키지 못한 것이 성령이 임하지 않았기에 지키지 못한 것이고 이제 신약은 성령이 임하였기에 성령을 도움을 받으면 내가 지킬 수 있다고 하면서 열심히 새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하여도 내 몸처럼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을 현실로 절감하게 되니 어떤 타협안이 나오는 것입니까? 완벽하지는 못하여도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려고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아직 어두움에 있는 것이라고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8b절에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비침이라고 합니다. 어두움은 자기의 힘과 능으로 이웃을 사랑하고자 애쓴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된 이웃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밖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어둠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을 이루시고 그 새 언약의 완성의 결과물이 새 계명인데 그 계명이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9절에 보면 빛 가운데 거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 어두움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빛 가운데 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 삶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실제적 삶을 계속하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 입으로는 ‘내가 빛 속에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 실제적 미움의 삶의 행실을 통하여 자기의 말을 스스로 뒤집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 소개되어지고 있는 ‘내가 빛 속에 있다’라는 이 말이 진정한 말의 행동이 되려면 10절의 내용처럼 그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빛의 영역의 가장 대표적인 행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두움 영역의 대표적 행실이 미움인 것에 대비적으로 빛의 영역의 대표적 행실이 ‘사랑’인데, 우리의 실제적 삶 속에서 사랑하는 행실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때에 우리는 이미 어두움으로부터 빛으로 옮겨진 사람이다는 것이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10b절에 보면 그렇게 진정한 말과 행동이 일치가 되어 빛 가운데 거하며 사귐을 이루어가는 사람 속에는 ‘거리낌’이 없습니다. 여기서 ‘거리낌’이란 ‘스칸달론’으로 원래 의미는 ‘방해물’이라는 중립적 단어입니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볼 때는 주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아니하고 교만하다든지, 우리 자신을 의뢰한다든지, 우리의 의를 내세운다든지 이렇게 하게 되어지면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스칸달론’ 곧 ‘거리낌’의 역할을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 ‘거리낌’을 끼고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거리낌’이 우리 속에서 제거되어야만 우리는 더 깊은 하나님과의 사귐 속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거리낌’이 부정적인 차원의 이야기라면 긍정적인 차원의 이야기는 ‘담대함’일 것입니다. ‘담대함’과 ‘거리낌’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대립적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3:21-22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될 때 우리는 그 앞에 나아가서 무슨 말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담대함’이란 단순히 심리적인 담대함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오는 ‘담대함’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결국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말 터놓고 얘기하는 사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거리낌이 없을 때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는 대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요소가 다름 아닌 ‘거리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어두움 속에 속한 사람이고, 이런 자는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이루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형제 사랑이 도대체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바울과 바나바의 예를 보면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바울을 바나바가 추천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어떤 일을 행한 사람인줄 알기에 그를 꺼려하였습니다. 이런 바울을 나중에 사도들이 형제로 맞이하며, 교제의 악수를 하였습니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형제로 교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한 가지의 고백이 형제를 사랑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역사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증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증거하는 곳이 얼마나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는 이미 지나간 것처럼 여기고, 지금 우리가 실천하여야 할 내용들만 가득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믿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너무 반갑고 기쁘고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무슨 도움을 주어서가 아닙니다.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용서를 받았는데 당신도 그런 용서를 받은 사람이군요하며 정말 사랑합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에 새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지 나의 힘과 능력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각처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을 받아들인 자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위하여 생명이라도 내어 놓으려고 한 것입니다. 눈이라도 빼어 주려고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루디아 같은 경우는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러자 바울의 일행을 자기 집에 맞아들이기 위하여 나로 예수 믿는 자로 여기거든 나의 집에 유하라고 하며 강권하여 있게 합니다. 이런 새 계명은 오늘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계명을 지키자고 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지금도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자기 백성들에게 적용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빛이 어두움에 비치듯이 새 계명이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8b절을 다시 보면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비췸이라”고 합니다. 참 빛이 비취는 것을 어두움이 막아낼 도리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절을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은 ‘이기지 못하더라’는 말로 번역이 됩니다. 어두움이 빛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새 계명이 오늘도 땅 끝까지 증거 되고 있기에 이해관계를 넘어서며 목숨도 버리는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셔서 우리로 이 계명에 사로잡혀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형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을 이루어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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