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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요 3:16-21
성경본문내용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8)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21)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강설날짜 2009-10-11

2009년 10월 11일 설교  


이처럼 사랑하사


말씀:요한복음 3:16-21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밤에 자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비밀을 가르쳐 주신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에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시간의 말씀과 연관시켜서 이해해야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를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와 연관시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는 저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가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으로 거듭나 영생을 얻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영생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16절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주셨다. 그 아들 예수님이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만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이렇게 생각하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믿은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도 ‘이 하나님 사랑을 믿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라’고 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에서 가장 큰 맹점이 무엇입니까? 제일 큰 맹점은 ‘내가 믿어 주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어 주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행함의 원리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곧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주어서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믿는 자들에게 그 쉬운 것을 왜 못 믿느냐, 그냥 믿기만 하면 되는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함의 원리 속에서는 믿음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믿음이란 말은 행함과 대조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라는 것은 사람의 행함의 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데 바로 이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의 길을 만들어 놓았으니 네가 믿고 영접하고 선택하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는 데 가장 큰 맹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이해하거나 믿는다는 사실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3:16절에서 강조점을 두라면 어디에 두시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기 쉽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곧 ‘누구든지 믿는 자’에 초점을 맞추기 쉽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스스로 믿을 자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1:10-11절에 보면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에서 ‘스스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자가 없다’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13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접하는 것이 사람의 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믿는 자도 사람의 능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믿으십시오’라고 하는 것은 마치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자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헤엄을 쳐라, 헤엄을 쳐라. 그래야 산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스스로 예수님을 ‘믿는 자가 없다’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이렇게 오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한 말씀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말씀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바 이 세상을 타락한 상태 그대로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이 본문이 말하고 있는 바를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했을 때 타락한 상태 그대로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한 자기 백성들에 대한 구원과 그리스도를 통한 재창조와 회복을 작정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할 때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할 때 세상의 모든 사람이라고 오해함으로 인해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얻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고 합니다.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곧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 하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볼 때도 세상은 타락한 이 세상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택하심을 받은 자를 가리켜 하시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신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많은 구절 가운데 한구절만 보겠습니다. 베드로후서 3:7절을 보면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심판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19절에 보면 그 심판의 증거가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믿지 아니하고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은 어두움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곧 어두움을 더 좋아하여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빛보다 어두움이 더 좋은데 어떻게 스스로 빛으로 나아 올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어두움의 일’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쾌락적인 그런 일로만 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 어두움의 일을 ‘사람의 이성과 견해’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과 견해는 행함의 원리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곧 사람은 잉과응보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후 인간의 이성과 견해는 완전히 부패해 버렸습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해와 견해가 근본적으로 어두움입니다. 이런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결코 빛 가운데로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처럼 사람의 불가능을 말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니고데모가 구약을 그렇게 잘 아는 데도 예수님을 메시아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선입견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죄인과 이방인들을 다 심판해버리고 자기들처럼 경건한 바리새인 같은 자들만 구원받아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어 내는 그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대가 무리가 아닌 것은 구약에서 메시아가 오는 그날을 심판의 날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날을 심판의 날로 말씀하지만 이방인도 주께로 돌아오는데도, 역시 인간이 성경을 보는 것은 아전인수 격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날 이방인들도 주께로 돌아온다는 것을 빼어버리고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9:11-12절을 보면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볼 때 유대인의 입장이면 무슨 말씀만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리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이라면 어떤 말씀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에돔의 남은 자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도 주님의 기업이 되리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도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세상 만민은 심판을 받고 자기들만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미가서 4:1-3절을 보면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 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 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아도 유대인이라면 자기들 중심으로 세계가 새롭게 재편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생각이나 이방인의 생각이나 모두가 메시아가 오시자 모두 심판아래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메시아를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대로, 자기들은 물론 성경의 증거라고 말하지만 어떻든 간에 메시아를 배척한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꼭 같이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심판 아래, 곧 정죄 아래 있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16절을 다시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처럼 사랑하심이란 어떤 사랑입니까? 심판 아래 곧 정죄 아래 있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자기 자녀들을 영원히 구원하시기 위해 더러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 정죄는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가 빛 가운데로 나옵니까? 21절에 보면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모두가 어두움이요, 그래서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데 빛으로 나오는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진리를 좇는 자들입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3:14-15절을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좇는 자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이끌어 내신 자들입니다. 이들은 빛으로 나아오는데 왜 빛으로 나아오는 것입니까?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좇는 자가 빛 가운데로 나오는 것은 자기들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자기 행함의 체계 속에서 삽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이 어떻게 은혜의 체계로 나아 올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사랑이 뭐길래, 행함의 사람이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까? 이 사랑을 성경에서 뭐라고 합니까? 로마서 5: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9-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보내어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화목제물이 되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무슨 수로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는 그러한 사랑을, 그러한 은혜를 받아들일 수조차 없는 무능하고 불가능한 자들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을 수 없는 무능하고 불가능한 자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 독생자를 믿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십자가를 제시하고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삼켜 버리는 능력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단지 조건을 제시하고 그 조건을 충족시켜야 되는 구원이라면 그것은 아직도 행함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삼키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되는 이러한 복음의 내용을 믿는다는 사실이 행함의 원리만 나타나는 이 세상에서는 기적중의 기적인 것입니다. 참으로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만이 믿게 될 수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 안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으셨습니까? 이러한 사랑이 믿어지십니까?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이제부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님을 아는 자입니다. 마태복음 15:21-28절에 보면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개라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인의 이와 같은 대답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여기서 볼 때 믿음이란 자신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정도가 아니라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합니까? 21절을 다시 보면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리로 나온 것이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기에 그 분만 높이고, 그 분만 증거 하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우리의 행함이란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신 그 사랑에 접촉된 자가 그 은혜에 기초해서 마땅함으로 나오는 헌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자기 자랑이 나올 수가 없고, 자기 의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 사랑을 덧입고, 그 사랑을 힘입어 영생을 얻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려 드리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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