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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사 1:10-17
성경본문내용 (10)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16)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17)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강설날짜 2009-11-22

2009년 11월 22일 주일예배 설교


삶의 예배


본문 : 이사야 1:10-17

 

우리는 요한복음 4장 말씀을 통해 예배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받으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 그랬습니다. 즉 성령님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곧 말씀 안에서 드리는 예배인 것이죠. 우리가 주일날 온 교회가 함께 모여서 바로 이러한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야 말로 우리의 삶 전체의 중심이요, 목표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예배를 단순히 주일날 11시의 공예배만으로 한정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주일예배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의 매일의 삶속에서 드리는 ‘삶의 예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주일예배는 우리의 6일 동안의 삶의 예배의 절정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는 또한 주중에 우리의 삶과 말과 행위를 통해서 드리는, 삶의 예배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늘 헌상기도 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매일의 삶 가운데서 주님께서 우리의 주가 되시고 왕이 되심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삶의 예배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면한 많은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예배는 화려하고 웅장하고 뜨겁게 드려지면서도, 이런 예배에 합당한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 참석에 열심을 내지만, 사회에서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와 삶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사야 본문을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삶의 예배가 어떠한지 점검해보고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10)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0-15)


이 이사야 본문은 이스라엘 가운데 예배와 삶이 얼마나 심각하게 분리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종교적 예배 행위에 아주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온갖 희생제물을 드리고, 또 절기를 지키며, 아주 경건하게 성회로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때로는 감동적인 뜨거운 찬양도 불렀습니다. 그리고 기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종교행위만 본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실만한 아주 훌륭한 신자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를 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거절하신 정도가 아니라 아주 가증스러워하시며 역겨워하셨고, 그들에게 복이 아닌 도리어 심판을 선고하셨습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아 백성들아!’하면서 아주 책망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치욕적인 호칭입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을 만큼 매우 심각하게 타락했음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을 보면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열정과 뜨거움을 가지고 하나님께 열심히 예배드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모순적인 상황이죠. 그들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예배를 받아주시고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단연코 자신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거절당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심판이 곧 닥칠 것이라는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종교의식을 거룩하게 거행하기보다 당장에 재를 무릎 쓰고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아니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근본 문제는 바로 삶과 예배가 단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한다고 했으며, 양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악인가 하는 것은 다음 구절에서 나타납니다. 15절에서 17절을 보시면...


(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16)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17)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그들의 문제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공의의 부재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했고, 공의를 구하지 않았으며, 사회적 약자들, 곧 고아나 과부를 압제하며 착취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단순히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더욱 본질적으로 그들의 신앙의 근본인 출애굽 신앙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 24:17-신 24:22]
(17)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말며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18)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19)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20)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며(21)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22)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여기 본문에 보면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는 삶을 살아라’고 하시면서 그 명령의 이유로써 반복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는 애굽의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이 종이었다고 하는 자신의 근본을 늘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도 과거에는 고아나 과부처럼 사회적인 약자였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인 은혜로 택하시고 구속하시며 출애굽시켜 주셨고, 지금 가나안 땅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땅히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죠. 또 기억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 삶 가운데서 정말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 고아와 과부들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구속함을 받은 백성다운 삶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예배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정한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본문의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고아와 과부들 위에 군림하고 압제하며 착취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뇌물을 주고받으면서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고 그들의 재산을 억지로 빼앗는 악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불의한 삶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양손의 피가 가득하다’고 표현 하셨습니다. 그들의 삶은 한마디로 한다면 철저하게 자기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삶이었습니다. 이웃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기 자신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방인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은 그러나 그 구별됨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방사회와 똑같이 되어서 강자가 약자를 압제하고 착취하는 약육강식의 사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악한 삶을 살면서도 본문에 보면 어떻게 합니까? 버젓이 성회로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하고, 그렇게 열렬히 예배했던 것입니다. 그런 예배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역겹고 가증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배를 더럽히고 가증스럽게 만드는 큰 죄악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삶이 결여된 외식적인 예배는 받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함을 받은 자들이고, 정말 하나님의 진노와 천벌을 피할 수 없었던 죄인들이었는데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속 곧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함을 얻은 자들인데... 우리도 만일 우리의 삶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은 자다운 삶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의 경우와 똑같이 우리의 예배도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본문에 있는 일이 과거 이스라엘에게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문제가 아닙니까?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없는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매일의 삶 가운데서 그 은혜를 늘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주님의 통치를 받으며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예배 없이는 우리가 암만 감동적이고 훌륭한 예배를 드려도 그 예배가 무의미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우리가 예배를 경건하게 드린다고 하는데, 경건하게 드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정결하고 거룩한 마음을 갖고서 예배한다는 말일까요? 물론 그것도 포함되겠지만, 경건이란 예배드릴 때의 마음의 자세에만 한정된 용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삶 속에서 하나의 체득되고 훈련되어진 습관을 말합니다. 하나의 성품화 되어진 성향이고, 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일관성 있는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삶에서 분명히 나타나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참된 경건이란 두 가지 요소를 내포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구제하는 삶입니다. 만일 교회 성도들 가운데나 아니면 이웃 가운데 어려운 사람, 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것을 희생해서 돕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참된 경건의 모습입니다. 만일 형제의 어려움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이 생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억지로 억눌러서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고, 그런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만일 신자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 삶은 세속에 물들어서,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신의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서 뇌물도 좀 주고받고, 사람들을 속이기도 하고, 돈 떼어먹고, 거짓말도 하고, 편법을 쓰고, 불법을 행하고, 탈세하고, 그렇게 불의한 삶을 살 때는, 그 사람이 암만 예배를 감동스럽게 드린다 하여도 그것이 가증스러운 것이 된다 하는 것입니다.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실제 마음의 방향성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데 빠져 있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라고 하는 자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남의 아내를 탐하고, 남몰래 바람 피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 하는지 모릅니다. 요즘 드라마가 다 바람 피는 것을 미화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드라마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오늘날의 상황을 드라마가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는 바람 피는 게 큰 죄가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아주 평범한,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만큼 이 사회가 성적으로 문란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일들이 성도들이라 일컫는 사람들에게서도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일반 성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일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것이 현금의 부인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뭐 이런 심각한 일 말고도 남몰래 인터넷을 통해 음란물을 보면서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 또한 이 점에 참 연약한 자임을 고백치 않을 수 없는데, 아마도 많은 남성 크리스챤들이 이점에 완전히 자유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상황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삶,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주일날 예배에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고 하는 것은 방금 살펴본 이스라엘의 예배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가증스러운 예배가 된다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고, 피해를 주는 사람의 예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전에 자원봉사센터에서 공익으로 근무했었는데, 그때 소장님이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소장님이 원치 않게 직원들에게 상처를 많이 줬습니다. 그래서 직원들과 회식가면 매번 소장님 씹는 얘기가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도 많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참 제대로 살지 못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고, 또 전도의 길이 막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소장님이 그래도 권사님이시라고 자주 직원들을 전도하는데, 그 전도가 먹힐 리가 없죠. 전도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인다운 삶,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분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 또한 직원들에게 똑바로 살지 못한 점이 많기 때문에 더욱 두려운 마음이 드는데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람들과 관계를 올바르게 맺지 못할 때, 우리의 예배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혹시 다른 사람에게 원망들을 일이 생각나거든 예배드리다 가도 일단 중지하고 그 사람에게 가서 먼저 화목한 후에 그 다음에 와서 예배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음으로써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만일 마음속에 어떤 사람을 향한 미움으로 가득하다면,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쓴뿌리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면, 그 사람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예배야 말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삶이 결여된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예배자의 자질이 참된 예배가 되게 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증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시 15:1-시 15:5]
(1)(다윗의 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3)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4)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5)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시 24:3-시 24:5]
(3)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4)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5)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런 본문들은 성소에 들어가기 위한 예전의식에 있어서 예배자의 자질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예배자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배자의 자질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는 조건이 된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조건을 따지신다면,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음으로 담력을 얻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만 이 본문들이 강조하는 것은 예배와 삶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짜 믿는 사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반드시 삶으로 이어져야 하고, 삶의 예배로 표현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를 죽이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경건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다. 우리의 예배가 삶속에서 잘 표현되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우리의 삶과 예배가 이스라엘의 모습과 혹시 흡사하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정말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우리가 너무나 자주 주님께 합당치 못한 예배를 드려왔음을 고백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매주 주님 앞에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에 앞서서 언제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서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겠다고 하는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삶 가운데서 주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경건한 삶의 예배를 드려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경건한 삶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잊지 말고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잊어버렸더라도 다시금 회개하고 기억하며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은혜를 잊어버리는 순간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예배가 분리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늘 기억하고 그 은혜위에 굳게 서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예배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날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하셔서 그 은혜에 기초한 삶의 예배를 온전히 드리는 우리 한결교회 모든 지체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거룩하신 주님 이 시간 주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주님 앞에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 뿐이온데,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주님의 참 사랑을 우리가 알고 깨달아서 날마다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원하여 주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고 헌신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시간 은혜주신 것을 감사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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