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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요 5:1-9
성경본문내용 (1)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2)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3)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4)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5)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6)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7)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8)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9)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강설날짜 2009-12-20

2009년 12월 20일 설교


예수님과 베데스다


말씀:요한복음 5:1-9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연못에 들어갈 수 없는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말씀의 권능으로 그의 오래된 육신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해 주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새 인생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이 시간 베데스다 연못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의 권능으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표적을 통해 계시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1절에 보면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 후에’라는 말은 사실 불분명한 시제로서 지금 기록되는 일이 언제 일어난 것인지를 우리는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요한복음의 흐름상으로는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사건 이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의 권능으로 살려주신 후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명절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명절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강해 설교의 왕자라고 불리우는 켐벨 몰간 목사 같은 분은 유월절로 봅니다. 하여튼 예루살렘의 분위기는 명절로 인해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축제의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어디로 가셨습니까? 2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셔서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으로 가셨습니다. 양문(洋門)은 예루살렘 성 동북쪽에 위치한 문으로 제사 지낼 때 동물들이 들어가는 문을 말합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베이트’와 ‘헤세드’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베이트’는 집이라는 말이고, ‘헤세드’는 은혜, 자비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란 은혜의 집, 곧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2b-3절에 보면 거기에 행각 다섯이 있었는데,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둑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이들 많은 병자들이 왜 거기에 와 있는 것입니까?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동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병 고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병자들은 이 한 가지 소망을 가지고 여기와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베데스다 연못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설이 무엇입니까? 4절에 보면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고 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가끔 천사가 와서 물을 동하게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로 천사가 가끔 내려와서 물을 동했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간헐천이라 가끔 물이 동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여튼 이 베데스다 연못에 가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하는데 그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떠한 병에 걸렸던지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이곳 연못의 이름이 베데스다 곧 은혜의 집이라고 불리워졌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전설로 인해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항상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물이 동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들어가 병 고침을 받고자 하는 한 가지 소망을 앉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곳은 이름만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지 정작 은혜와 자비와는 전혀 상관없는 극한 경쟁만 있는 곳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사가 가끔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하는데 그때 누구든지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가 낫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는 2등도 3등도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1등만 고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의 분위기가 어떠했겠습니까? 늘 긴장과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었을 것입니다. 평소에는 동변상련이라고 서로 위로하고 도우며 살지만 물이 동하면 상황은 급변하는 것입니다. 또 천사가 언제 와서 물을 동하게 할지 모르기 때문에 늘 긴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동했을 때도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만 나음을 받기 때문에 서로 돕고 놀다가도 물이 동하면 자신이 먼저 뛰어들기 위해 기회를 엿봤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눈치를 보며 늘 긴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물이 동하게 되면 인정사정이 없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짓밟고 1등을 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하느라 아비규환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는 이름은 자비의 집이지만 그와는 전혀 거리가 먼 곳입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물이 동했을 때 누가 가장 먼저 들어 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 중에 몸이 성한 사람일 것입니다. 정작 은혜가 필요한 중증 환자는 들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쟁에 뒤처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은혜가 필요한 병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것입니다. 암 선고를 받고 죽게 된 자가 들어가야 하는데 아토피 환자가 먼저 뛰어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들어가야 하는데 눈에 다래끼 난 자가 먼저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먼저 들어가야 하는데 운동하다가 다리를 삐끗한 사람이 먼저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쟁으로 아수라장이 되는 그곳이 바로 자비의 집 곧 은혜의 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베데스다입니까? 이곳이 무슨 자비의 집이요, 은혜의 집입니까? 이름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요?

3절을 다시 보면 그 안에 많은 병자, 곧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가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병자들이 누가 먼저 연못에 들어갈 자가 있습니까? 소경이 물이 동했는지 안동했는지 알 수 있습니까? 절뚝발이가 얼마나 잘 달려야, 다리 성한 자를 이기고 물에 먼저 들어가겠습니까? 혈기 마른 자는 중풍병자입니다. 중풍병자가 무슨 수로 물에 들어갑니까? 구르기 한다고요? 뛰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은혜가 임하여 있는 못이라 하여도, 자비가 흐르고 있는 연못이라고 하여도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자비의 집에 자비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의 집에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장에 누가 오셨습니까? 자비와 은혜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자비가 없는 자비의 집에 자비 자체이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를 찾아 가셨습니까? 가장 불가능한 자, 혈기 마른 자, 그것도 38년이나 누워있던 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다가가셔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6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보셨다’라는 말은 깊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자비의 눈으로 보셨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외면하는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를 보시고 그의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셨습니다. 여기서 ‘아셨다’는 말도 얼마나 오랜 동안 병마에 시달렸으며, 지금도 얼마나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며, 절망하고 있는가를 다 아셨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의 절망과 마음의 고통과 아픔을 아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의 누운 모습을 보시고 이미 그 병이 오랜 줄을 아시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러면 이에 대한 38년 된 병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에 보면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물이 동할 때 자기를 못에 넣어줄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가는 동안에 남들이 먼저 들어가 버린다고 원망했습니다. 이 병자는 아마 이런 일을 여러번 겪었던 것 같습니다. 38년이나 되었으니 얼마나 많이 실패를 경험했겠습니까? 그는 반복해서 실패를 경험하면서 자신에 대한 절망과 이기적인 사람들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낫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도 상실한 채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냥 거기에 죽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사람이 자비와 은혜의 실체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면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예! 제가 낫고자 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사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매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낫고자 한다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 버린다고 했습니다. 38년 동안 은혜의 집에 누워있어도 자기에게 은혜 베푸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몇 사람이 그 곳에서 나음을 입었는지 모르지만 과연 그런 곳이 있다면 누가 이런 38년 된 병자를 물에 넣어 주겠습니까? 능력 있고 빽 있는 자가 물가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뛰어 들지 않겠습니까? 거기 모인 모든 병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다 절박한 인생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은혜와 자비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가 절대로 자비의 집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베데스다 연못을 통해서 교회가 이 세상에서 세상이 원하는 것을 주면 안 되는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3년만 믿으면 자기 집을 살 수 있고, 5년만 믿으면 어떤 병도 고칠 수가 있고, 10년만 믿으면 자녀가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 교회가 어떻게 될까요? 가난한 사람들은 발도 못 드려 놓을 것입니다. 목사가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하게 될 것입니다. ‘목사님 다음번 등록은 우리 삼촌입니다. 다음번 등록은 저의 조카입니다’하면서 돈을 보따리로 싸들고 오지 않을까요? 청와대에서도, 국회에서도 청탁이 오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교회의 모습은 일체의 경쟁이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만이 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세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경쟁사회입니다. 그것도 무한 경쟁 사회입니다. 경쟁에서 밀리면 죽습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무한 경쟁을 합니다. 그래서 쉼이라고는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러한 경쟁 사회에서 살다가 보니 교회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경쟁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교회와 교회끼리 경쟁합니다. 서로 큰 집짓기 경쟁을 합니다. 서로 사람 늘리기 경쟁을 합니다. 창원의 가장 큰 교회로 소문난 교회는 수백억을 드려 다시 예배당을 짓는다고 합니다. 서울의 한 유명한 교회는 2천억이 넘는 돈을 드려 분당에 새로운 예배당을 짓는다고 한국 교계가 말이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는 온통 교인 수 늘리기 경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교회에 뜨는 사람들은 무슨무슨 전도왕들 입니다. 진돗개 전도왕, 양육 전도왕, 파워 전도왕, 능력 전도왕, 웃음 전도왕, 심지어 마사지 전도왕까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할 것없이 이들 전도왕을 모셔다가 전도 집회를 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말씀의 본의를 드러내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와 교회끼리 경쟁하여 이기기 위해 교회 안에서도 온갖 경쟁을 붙입니다. 전도경쟁, 헌금경쟁, 충성경쟁 등등. 경쟁이 없으면 발전이 없으니 교회 안에서도 경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대형 할인마켓이 생기면 작은 구멍가게가 죽듯이 교회도 대형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들은 대형교회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교회를 특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경쟁원리가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자비가 넘쳐야 할 교회에 38년 된 병자와 같이 원망하며 남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은혜는 사라지고 온갖 원망과 불평과 불신과 판단으로 세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혹자는 세상보다 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곳이 교회라고 합니다. 참으로 자비의 집에 자비가 없습니다. 은혜의 집에 은혜가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리에 누워서 예수님을 보고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가 정말 자비와 은혜의 실체가 되신 예수님을 압니까? 이 예수님을 찾고 그를 절대적으로 의지합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8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느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를 믿어라. 그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나를 믿으면 내가 고쳐주마 그렇게 말씀하시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면 내가 고쳐주마 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임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방적인 주권으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9절에 보면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고 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곧 그 병이 나아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38년 된 병자가 나아서 일어나 자기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된 것입니까? 이 중풍병자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그 말씀을 믿었기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역시 무늬만 은혜이지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에게는 스스로 예수님을 믿을 그럴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조차 알지도 못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했을 때 정말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께서 고쳐 주실 것을 믿었다면 다른 사람들이 안도와준다고 원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낫고자 한다고 예수님께 매달리며 고쳐 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원망하였습니다. 낫고자 하는 소원도 상실한 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38년 된 병자가 나아서 일어나 자기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그 말씀의 능력이 이 병자를 낫게 하시고, 일어나 걸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이 38년 된 병자를 낫게 하셨습니다.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이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시고, 새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통해서 계시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진정 베데스다가 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자비의 본체가 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은혜의 본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참 베데스다가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새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새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님의 은혜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러한 동일한 주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 연못가에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다 고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38년 된 병자는 주님의 선택적인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이러한 은혜를 입은 자가 모인 곳입니다. 주님의 선택을 받아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음을 자랑 할 수 없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나의 못남을 나타내는 곳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었기에 어떠한 방법으로도 스스로 은혜 속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택을 받고, 주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들만이 은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은혜를 거부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존심이, 우리의 의가 주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은혜로 삼켜시려 하는데 우리는 그 은혜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들어가면 자기가 죽는 냥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미 삼키워진 사람입니다. 이미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삼키워진 자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라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시고 그 은혜로 우리를 삼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입은 자는 그 은혜 외에는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목숨을 바쳐도 당연한 것이지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주장하고 남을 탓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 오셔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표적을 통해 계시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은혜와 자비의 본체가 되심을 알게 하시고, 그 은혜의 본체가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말씀의 권세로 삼키웠음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참 베데스다 되신 주님 안에서 주님의 자비를 잘 나타내 가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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