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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디모데후서 공부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말씀:디모데후서 2:20-26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써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함을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무엇보다도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 일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가 드러나게 되고, 교회가 진리 가운데 굳게 세워져 가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써 힘써야 일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20-21절 말씀을 보면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처럼 귀히 쓰는 그릇도 있고, 나무그릇과 질그릇처럼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디모데에게 주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 무엇에 힘써야 하는지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큰 집’이라고 할 때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oijkος’(오이코스)인데 이는 사람이 거할 수 있는 집을 가리킵니다. 어떤 학자는 ‘큰 집’을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칼빈과 많은 학자들은 ‘가시적인 교회’ 곧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칼빈과 같은 입장에서 본다면 큰 집의 각 그릇들은 주님께 쓰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큰 집에 있는 각 그릇들을 교회 안에 있는 선생들에 대한 말이라고도 하였습니다. 하여튼 바울 사도는 이러한 큰 집에 있는 여러 종류의 그릇 비유를 통해서 주인인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자들이 있는 반면에 또한 천하게 쓰임 받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귀하게 쓰임 받고 천하게 쓰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는 것일까요? 여기서 ‘귀하게 쓰임 받는다’는 것은 ‘주인의 손이 항상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천하게 쓰임 받는다’는 것은 ‘주인의 손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 2장에서 하나님의 교회에 이러한 모습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16-17절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는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딤후 2:16-17). 후메내오와 빌레도와 같은 자들은 망령되고 헛된 말을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을 부정하고 다른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들은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하나님의 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바울 사도는 오늘 말씀에서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손에서 떠나지 아니하는 삶을 살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절정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는 믿음이 바로 복된 믿음인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러한 신앙의 비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늘 함께 동행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모습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 에녹의 경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한 믿음의 사람으로 에녹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5:21-24절 말씀에 보면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를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사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워 간 사람은 에녹과 불병거를 타고 올라간 엘리야 두 사람 뿐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워 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에녹의 모습은 우리에게 항상 도전이 되는 삶입니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5절 말씀에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에녹이 믿음으로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참 믿음의 사람의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일주일에 한두번 예배드리기 위해서 교회 예배당에 출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일날 온 교회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상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우리의 전 삶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로마서 12:1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전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에 날마다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장성한 자의 신앙생활은 우리의 전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의 거룩한 계획에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과 늘 함께 동행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성숙한 자의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고 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는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21절 말씀을 다시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ejkkaqaivrw’(엑카다이로)라는 말인데 ‘세척하다’, ‘완전히 제거하다’, ‘철저하게 깨끗이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고린도전서 5:7절 말씀에도 쓰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7절 말씀에 보면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내어버리라’라는 말이 ‘ejkkaqaivrw’(엑카다이로)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자기 속에 있는 누룩을 내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집안의 모든 누룩을 제거해 버리듯이 자신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제거해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은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자입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택하신 하나님 나라에서 선한 일군다운 그릇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를 깨끗케 하는 자입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된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되어 선을 행하기에 온전케 되는 준비가 되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21절을 다시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케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이런 것’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앞에서 언급한 것을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 본 14-19절 말씀을 보면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딤후 2:14-19). 이 말씀에 기초해서 보면 바울 사도가 말하는 ‘이런 것’이란 거짓 교사들이 말하는 망령되고 헛된 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복음 진리에서 벗어난 모든 불의한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쓰시기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려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교훈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이런 자가 주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22절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는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 쓰시기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청년의 정욕이란 무엇입니까? 당시 디모데는 젊은 목회자였습니다. 디모데가 젊었기 때문에 젊은이로써 나오는 격정과 명예심과 조급함 등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쓰시기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부를 때에 깨끗하지 않은 마음으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깨끗하지 않는 마음으로 부른다는 것은 자기 욕심을 따라 부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회자도 얼마든지 자기 욕심과 야망을 가지고 목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목회자가 자기 영광과 자기 명예를 위하는 욕심을 감추고 교회의 부흥을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창원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되어 이 지역에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자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계적인 교회가 되자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큰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드리자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물론 말로는 주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자기 목회적 야망과 욕망을 이루기 위함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되 자기의 욕심과 욕망과 자기 만족과 자기 유익을 위하여 부르지 않고 정말 주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길은 혼자서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함께 교회로 세움을 받은 자들이 서로 격려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도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교제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란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을 힘입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복음의 진리를 믿으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화평’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회복하는데서 오는 평안을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까?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은 우리가 세상을 사는 일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은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만이 좇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부르는 자들과 함께 좇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하게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는 자가 하나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란 자기가 무엇을 결정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신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을 세상적인 성공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길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를 충성 되이 여겨 하나님의 역사에 사용하여 주심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써의 마땅한 자세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주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입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다툼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 보면 변론이 일어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변론이 일어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상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상해버리면 어떤 말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은 변론을 버려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주의 종들은 다투지 말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하라고 합니다. 24-26절 말씀을 보면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종들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징계해야 합니다. 여기서 ‘거역하는 자’란 진리를 아직 몰라서 거역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렇게 하면 반드시 그들이 돌아온다는 그런 말은 아닙니다. 종이란 마땅히 이러하여야 합당한 그릇이 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하여서 모든 사람들이 다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온유함으로 징계하면 25-26절 말씀에 보면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면 ‘혹’입니다. 이것은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한 사람이 회개하고 진리 가운데로 돌아오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회개하게 하시고 돌이켜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것은 곧 구원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땅히 증거 해야 할 진리를 증거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종들은 조급하거나 다투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고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택하신 자들을 일깨워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 것입니다. 내가 절제하고 온유하고 가르치기를 아무리 잘하여도 내가 돌아오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돌아오게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인정하는 자가 주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인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깨끗케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비우며,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좇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써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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