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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눅 9:46-56

2020년 누가복음 공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가 큰 자니라

말씀:누가복음 9:46-56

 

지난 시간에 우리는 변모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산 아래에 있던 아홉 명의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귀신에 사로잡히는 한 아이를 고쳐 주시고 두 번째 자신의 죽으심에 대해서 예고하시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 말씀에는 여러 가지 말씀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며 서로 변론하는 사건(46-48), 요한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를 금하자고 제안하는 사건(49-50),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하늘로서 불을 내려 멸하자고 제안하는 제자들(51-56)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46-48절을 보면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5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승천하실 기한이 차가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이 길은 사람들에게 넘겨져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서로 누가 크냐고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모산에 올라가실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열두 제자들 간에 ‘서로 누가 크냐’하는 문제로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9:33-37절에 보면 이 이야기가 자세히 기술 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3-37).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을 보면 누가는 제자들의 다툼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46-48절을 다시 보면 누가는 ‘변론’ 곧 ‘다툼’이라는 용어를 두 차례나 언급합니다. ‘변론’은 ‘디알로기스모스’(dialogismov")라는 단어인데 의심과 논쟁을 목적으로 추론하고, 고민하고, 깊이 생각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누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면의 거부 혹은 저항을 묘사하기 위해서 이 용어를 ‘마음’과 연결해서 사용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저항은 악인들의 특징이 아니라 의인들, 곧 의로운 유대인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예수님의 제자들의 특징입니다.

 

오늘 본문의 ‘변론’은 ‘내면의 분쟁’이며, 제자들 중에 누가 크냐에 대한 다툼입니다. 변모 사건 이후에 예수님과 함께 변모산에 올라간 세 명의 제자들과 올라가지 못하고 산 아래에 있었던 아홉 명의 제자들 사이에 이런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명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누가 크냐는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참조. 마 20:20-28; 막 10:35-45). 예수님께서는 귀신에 사로잡히는 아이를 고쳐 주신 후에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의 길을 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44절에 보면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곧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이런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누가 크냐하는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일로 병행구절인 마가복음에서 본 것처럼 길에서 싸웠습니다. 그래서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9: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에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고 싸웠기 때문에 부끄러워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잠잠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는 관심이 없고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길에서 싸운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제자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47-4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 변론하시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고 하셨습니다(48).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을 군사적인 메시아로 생각하고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원수를 쳐부수고 다윗 왕국과 같은 왕국을 건설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에 그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에게 어린 아이 하나를 자기 곁에 세우시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인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큰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헬라와 유대 사회에서는 어린 아이는 사람의 수에도 넣지 않는 미미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 사회에서 어린 아이는 실제로 사람들 중에 가장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어린 아이는 가장 작고 중요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어린 아이를 자신의 이름으로 영접하면 곧 그 사람은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누구든지 자신을 영접하면 곧 그 사람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제자들이 배워야 하는 겸손의 모델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린 아이는 ‘작은’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의 예’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겸손의 모델로 어린 아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영접하는 예수님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자주 작고, 무력하고, 중요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굶주리고, 목마르고, 고독하고, 헐벗고, 투옥된 자들에게 반응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40절에 보면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보잘 것 없는 친절이 하늘에 이르는 연쇄 반응을 시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행하는 것마다 예수님께 행하는 것이며, 예수님께 행하는 것마다 하나님께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냐며 서로 다투는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고 하셨습니다(48). 그러시면서 “너희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마음은 서로 누가 크냐고 계산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는 정 반대입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세상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귀 담아 듣는 사람입니다. 그 들어야 할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이야기를 귀 담아 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 외에는 달리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보실 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누가 크냐며 다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높아지려고 하고 하늘 나라에서도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는 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말씀을 귀에 담아두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이해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 곧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귀 담아 듣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하시고 그 십자가 복음의 은혜 위에 굳게 서서 주님의 자비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 49-50절을 보면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열두 제자들을 대변해서 말합니다.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금했다’는 말이 ‘에콜뤼오멘’(ejkwluvomen)인데 이 단어는 미완료과거시제로 요한이 지속적으로 금하는 반응을 보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가 당신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라고 합니다. 요한이나 예수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 중에 누구라도 자신들을 중심에 놓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않기 때문에’라고 하며 누군가를 질책하는 것은 주제넘은 행동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에게 ‘그가 주님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금했다’고 하지 않고 ‘그가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않음으로 금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 요한이 예수님을 따르는 핵심 그룹에 속해 있다는 엘리트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의식으로 인해서 그는 배타적이 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제자의 소명을 섬김으로의 부르심이 아니라 특권과 배제의 권리로 이해 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이와 같은 태도는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이야기에 나타난 교훈과는 완전히 대조가 되는 태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과 제자들은 37-43절에서 제자들이 할 수 없었던 일 곧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어떤 사람이 실행하는 것을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요한은 시기심과 배타적인 의식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로인해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막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요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50절을 다시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금하지 말라’는 말이 ‘콜뤼에테’(kwluvete)라는 말인데 이 말은 현재 명령형으로 그런 사람을 막지 말라는 예수님의 일반적인 법칙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이름을 알리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알리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권의식과 배타적인 요한과 제자들에게 포용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9:1-50절에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대화는 교회의 기독론에는 단호함이 있어야 하지만 교회론에는 열린 태도가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기독론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곧 다른 복음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갈 1:6-10). 그러나 교회론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만 옳다, 우리 교회만 바른 교회다고 하는 배타성을 버려야 합니다. 바른 기독론을 가진 교회라면 곧 바른 복음을 전하는 교회라면 함께 주님의 교회로 포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 51-56절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결심을 하시고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사마리아를 가로지르면 빨리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고 해서 개 취급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의 땅을 밟지 않고 사마리아 땅을 빙 둘러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사마리아 땅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마리아 마을로 제자들을 앞서 보내어서 예수님의 일행을 위하여 예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제자들이 한 촌에 들어갔는데 저희가 예수님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고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무슨 제안을 합니까? 54절에 보면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들’(막 3:17)이라는 별명답게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이런 끔찍한 표현을 한 것은 엘리야가 했던 말에 근거합니다. 열왕기하 1장에 보면 엘리야는 두 번이나 이스라엘 왕 아하시아가 보낸 군인들에게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고 요청했었습니다. 열왕기하 1:10절에 보면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인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서 저와 그 오십인을 살랐더라”고 했습니다. 또한 열왕기하 1:12절에 보면 “엘리야가 저희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인을 사를지로다 하매 하나님의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서 저와 그 오십인을 살랐더라”고 했습니다. 특히 선지서에서 불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암 1장; 호 8:14)과 주의 날(욜 2:3; 말 4:1; 사 66:15-16)을 의미하는 은유로 등장합니다. 엘리야가 아하시아의 군인들에게 요구했던 것처럼 세베대의 두 아들은 불타는 열정으로 사마리아인들을 불태우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들의 열의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습니다. 곧 당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에게 가졌던 오랜 적대감을 고려할 때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꾸짖으셨습니다. 55절에 보면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꾸짖다’라는 말이 ‘에피티만’(ejpetivmhsen)인데 이 단어는 굉장히 강한 어조로 주로 귀신들을 꾸짖어 쫓아낼 때 사용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꾸짖으시고’라는 말에 관주가 붙어 있습니다. 관주에 보면 “어떤 상고 사본에는 55절 끝에 다음 말이 있음 「가라사대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하러 왔노라」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간주에 근거해서 보면 지금 제자들은 제 정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보인 광적인 태도를 강하게 거부하셨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힘이라도 사용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주로 부르지만 예수님께서는 고대 사회에 편만해 있던 로마 황제 숭배사상에 나타난 것과 같은 권력자의 절대적인 권한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로서 힘과 폭력이 아니라 약함 곧 고난과 배척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22절에 보면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받으신 후에 반복해서 이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9:22, 44).

 

또한 야고보와 요한은 제자도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역할을 남용하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인자를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신 후에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56). 이로써 한 지역의 거절로 인해서 복음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게 되었습니다(롬 11:11-12).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르게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바르게 따르며, 주님께서 이루시는 역사를 바르게 섬겨 나가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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