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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눅 9:57-62

2020년 누가복음 공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말씀:누가복음 9:57-62

 

우리는 지금 누가복음 9장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누가는 9:1절에서 시작한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주제를 오늘 본문에서 제자가 되고자 하는 세 명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대화하는 장면으로 마무리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 자기를 따르고자 하는 세 사람과 나눈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57절을 보면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길 가실 때에’라고 합니다. 51절 말씀에 기초해서 보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승천할 기한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하기를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 성별이 어떠한지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8:18-22절에 보면 이 사람을 서기관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8:19절을 보면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고 했습니다. 서기관이면 율법 선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이 서기관을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서기관이 먼저 자원해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 것입니다. 당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고자 나섰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당시 서기관은 율법 선생으로서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한 것은 즉흥적인 감정에 의한 결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시고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의 크신 위엄과 권능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들이 대망했던 이스라엘의 회복에 참여 하는 영광을 얻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을 예의 주시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마침내 예수님을 따르고자 결심한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고 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장담했던 모습과 비슷합니다. 누가복음 22:33절에 보면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듯이 베드로의 이런 장담은 허언에 불과했습니다. 누가복음 22: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베드로에게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누가복음 22:54-62절에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혀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시자 닭 울기 전에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심지어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습니다(마 26:74).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이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58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로 가든지 자신을 따르겠다고 장담하는 이 사람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58). 동물은 자연에 순응합니다. 그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는 자연에 순응해서 살도록 보냄을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이시지만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외인이요, 나그네입니다. 인자는 이 땅에서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세상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권리를 요구하지만 인자는 오직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만 소망을 제공합니다. 세상은 안식과 평화를 위한 권리를 요구하지만 인자는 세상에서 고난의 길로만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신 말씀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미움을 받으며 배척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영광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수용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가혹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가야 할 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이 땅에서 무엇을 보장해 주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안식과 평화를 제공해 주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가는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스스로 자원해서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이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본문에서는 이에 대해서 명확히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우리가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쳐 주시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바람과 물결을 명하여 잔잔케 하신 이런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도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많은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는 모습이 부러웠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면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고 하신 말씀에 기초해서 볼 때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여튼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고 하신 것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생과 고난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감성적으로 생각하고 감정적으로 따를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했다는 그 결과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다. 곧 이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았는지 살지 않았는지 그 결과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머리 둘 곳 없이 사신 예수님, 곧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사모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라 나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살고자 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세상에서 미래에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권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인자가 머리 둘 곳 없이 사신 것처럼 고난의 길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고난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곧 자기 부인,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주님이 가신 그 고난의 길을 사랑하며 주님이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 5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이 사람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59b절에 보면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죽은 자들을 매장하는 것은 토라에서 명령한 ‘율례와 법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출 18:20). 매장은 사랑의 행위 중에서 최고의 행위에 해당하며, 눈물과 애곡과 애절한 통곡이 동반됩니다. 죽은 자를 매장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이게도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도덕적 의무를 자신을 따르는 것보다 덜 중요하다고 평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60절을 보면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의무에서 자유로운 경우는 오직 나실인 서원을 한 경우와 대제사장의 경우뿐이었습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에게 장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민수기 6:6-7절을 보면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그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레위기 21장에 보면 대제사장의 경우는 부모가 죽어도 장사 지낼 수 없다고 합니다. 레위기 21:10-11절을 보면 “자기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말지니 부모로 인하여도 더러워지게 말며”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부모가 죽었을 때도 장사 지냄으로 자신을 더럽힐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말씀에 기초해서 볼 때 오늘 본문 60절에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신 명령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나실인으로 서원하는 것이나 대제사장으로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성별된 일임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0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라는 말은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 곧 복음에 반응하지 못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신 말씀은 토라를 포함해 이전에 있었던 어떤 형태의 계시에 견주어 예수님의 자기 이해를 가장 강력히 보여주는 진술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 예수님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는 시내산에서 주어진 모세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말씀은 자식으로서 지켜야 할 인륜의 도리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 의무를 잊지 않고 수행해야 할 중요한 일에 앞서 지금 그가 해야 할 더 긴박하고 절박한 의무가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긴박한 필요성은 유대 사고 속에서 가족과 또는 친족을 장사해야 하는 책임이 율법에서 규정하는 통상적인 의무보다 우선하는 것이며, 이는 다른 어떤 책임에서도 우선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그가 부모상을 겪게 되어 자식으로서 치르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보다 먼저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죄에서 구원을 받아 영생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 얻는 일에 관한 것으로 생명 없는 죽은 자들의 장례를 치르는 것보다 우선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를 장사 지내는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 머물다가 후에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하겠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본다면 아버지가 돌아갈 때까지 집에 머물며 복음 사역에 참여하는 것을 미루는 일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의 행동임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이 사람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결과 곧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았는지 살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해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성별된 삶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님을 쫓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최우선 순위를 두지 않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예수님께 최우선 순위를 두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 61절을 보면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의 이 사람은 내가 주를 좇겠습니다만 먼저 가족과 작별하게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이번 제자 후보 역시 유대의 건전한 전통적인 전례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유대의 전통적인 전례에 근거해서 예수님께서 당연히 자신의 요구를 승인해 주실 줄로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엘리사가 그를 따르기 전에 부모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9:19-21절을 보면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부르심에 따라 나선 장면입니다. 아마 오늘 본문의 세 번째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이 사람은 이 사건을 기억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62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세 번째 이 사람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에서는 첫 번째 사람과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과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온 세상에 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없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그의 마음에 품은 생각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면서 먼저 자신의 가족과 작별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61절에 보면 “주여! 내가 주를 좇겠습니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내 가족들’은 의사 결정권이 있는 ‘남자들에게’라는 말로 아버지와 형제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라는 말은 ‘내가 집으로 가서 의사 결정권이 있는 남자 가족들에게 허락을 받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곧 먼저 자신이 집에 가서 남자 가족들에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고 이를 허락해 주면 그들의 결정에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62절을 다시 보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유대 속담을 인용한 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밭이랑을 가는 자는 자기 주위의 이곳저곳에 마음을 빼앗겨 산만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뒤를 돌아보아 다른 곳에 시선을 두어서도 안 됩니다. 그럴 경우 쟁기로 가는 밭이랑이 똑바로 갈아질 리가 없습니다. 삐뚤삐뚤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쟁기로 밭이랑을 갈 때에는 앞을 보고 그 일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비유적 설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이것 외에 다른 것을 돌아보아서는 안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가 뒤를 돌아보아 다른 것에 마음이 빼앗겨 있고 거기에 온통 생각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그에게는 예수님에 의해서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가 마음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생을 얻는 생명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으며 영생에 대한 열망이 없기에 그것을 목적으로 하고 목표로 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가족의 허락을 구하고 또한 허락을 받아서 하거나 하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정해진 하나님의 일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온 세상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런 시점에 가족의 허락을 받고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난 후에 따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라야만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생각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으로 예수님을 따르며 함께 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결정하는 일을 따르려는 것에서 예수님을 따르며 함께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6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의 결과에 대해서도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제자가 되고자 하는 세 명과 나눈 대화를 통해서 누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지를 말씀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세 사람과 나눈 대화를 보면 세 사람 모두 익명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결국 예수님을 따랐는지, 따르지 않았는지 그 결과에 대해서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세 사람과 예수님과의 대화는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를 부른 사건이 아니라 제자도 곧 예수님께서 9:23절에서 언급한 자기 부인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제자도의 실제 상황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가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제자도를 새롭게 함으로 주님을 따르기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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