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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눅 10:1-16

2020년 누가복음 공부

칠십인 제자를 전도여행 보내신 예수님

말씀:누가복음 10:1-16

 

오늘부터 우리는 누가복음 10장 말씀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70인 제자를 전도여행 보내시는 사건(1-16), 70인 제자들의 전도여행 보고 및 예수님의 감사기도(17-24),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 이야기(25-37),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38-42) 등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70인 제자를 전도여행 보내시는 사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절을 보면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 후에’라는 말은 문맥상으로 보면 지난 시간에 살펴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제자가 되고자 하는 세 사람과 대화를 나눈 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열두 제자들의 사명에서 이제 예수님께서 따로 세우신 70인 제자들의 사명으로 전환되는 것을 알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세 사람과 제자도에 대해서 말씀 하신 후에 따로 70명의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둘씩 둘씩 짝을 지어 자신이 방문 하고자 하는 각 동네와 마을로 앞서 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을 지어 보내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사형 판결을 위해 두 명의 증인을 요구하는 규례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17:6절에 보면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거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거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또 신명기 19:15절에도 보면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는 두 명의 증인이 요구된다는 사실은 70인 제자들의 사명이 삶과 죽음의 문제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부각시킵니다. 유대교에서 증인들을 짝으로 세우는 것은 제한적으로 나타나지만 초기 기독교에서는 널리 받아드려졌습니다(눅 24:13; 행 3:1, 8:14, 9:38, 13:2-3, 15:22, 15:39, 15:40, 19:22).

 

예수님께서는 70인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을 지어 전도여행 보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추수’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상징합니다(욜 3:1-13; 사 27:11-12).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위한 핵심 계절을 상징합니다. 오늘 말씀에 기초해서 보면 예수님은 지금이 추수 때라고 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추수 때라는 것은 곡식을 거두는 추수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거두시는 영적인 추수 때를 말합니다. 이 영적 추수 때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요한복음 4:34-38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농부에게 있어서 가장 즐거운 때가 언제입니까? 추수 때일 것입니다. 자기가 직접 농사를 지은 것이 아니라도 추수에 참여하게 되면 즐겁습니다. 그래서 추수 때 즐거운 마음으로 추수에 동참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추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추수하는 일은 즐거운 일입니다. 시편 126:5-6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노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70인 제자들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추수하는 즐거움에 참여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되 추수할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하셨습니다(2). 여기서 ‘추수하는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킬 수 있으나 예수님이 1절에서 ‘주’로 밝혀지고 있고, 17절에서도 ‘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이 곧 예수님의 사역과 동일함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은 예수님으로 이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할 것은 많되 추수할 일군이 적으니”라는 말씀에서 ‘적다’라는 말은 ‘올리고이’(ojlivgoi)라는 말인데 이 말은 범위, 수, 기간, 가치에 있어서 ‘아주 작은’, ‘거의 없는’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이 일을 맡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70인 제자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이며, 또한 낙심이 되게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70인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군이 적기 때문에 추수할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달라고 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복음을 듣게 하시는 때가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은 많은데, 그 일을 하는 사명을 맡게 될 예수님의 제자의 수는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하는 일군들을 보내어 주시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70인 제자들을 전도여행 보내시는 심령이 어떠하다고 합니까? 3절을 보면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70인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합니다. 이 직유는 참으로 생생하고도 격렬합니다. 양은 늑대 앞에서는 무방비 상태입니다. 처참하게 찢겨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초기 교회사를 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대로 반영됨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8:3절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에 이어서 누가는 사울이 갓 태어난 교회를 진멸하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참조. 행 9:1-2, 26:11). 이처럼 70인 제자들을 보내는 것은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추수의 절박함을 말해 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70인 제자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어떻게 가라고 합니까? 4절을 보면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70인 제자들을 전도여행 보내시면서 네 가지를 금지합니다. 전대도 가지고 가지 말고, 주머니도 가지고 가지 말고, 신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전대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고대 여행객들은 주로 허리띠 아래쪽 외투 안에 돈을 묶고 다녔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그렇게 합니다. 전대가 원문으로 보면 ‘발란티온’(ballavntion)인데 이 단어는 신약에서 누가복음에만 사용되는 것으로 잘 사는 여행객이 갖고 다녔을 실제 돈 가방이나 지갑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첫 번째 금지는 곧 ‘전대를 가지지 말라’는 말은 필요한 것을 위해 사용할 돈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여분의 혹은 너무 많은 돈을 지니지 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70인 제자들은 주머니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머니’는 ‘페라’(phvra)라는 말인데 이 단어는 여행용 가방 혹은 옷가지와 식량을 담은 배낭을 가리킵니다. 당시 목자들과 견유 철학자들이 흔히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견유 철학자들은 B.C. 4세기부터 그리스도교 시대 직전까지 번성했던 그리스 철학의 한 학파로 모든 제도, 사유재산, 결혼, 종교 등을 부인하고 거지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70인 제자들은 ‘기독교 견유학파’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70인 제자들에게 옷가지와 식량을 담은 여행용 가방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70인 제자들에게 신을 가지지 말라고 합니다. 돌과 가시덤불이 많은 팔레스타인의 지형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신발을 신지 말라는 지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 것입니다. 누가복음 9:3절에서 봤듯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신발을 가지지 말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9:3절에 보면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신발을 가지지 말라는 말은 신발을 신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여분의 신발을 가지지 말라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라는 말은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70인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수행해야 할 사명의 긴박성을 말해 줍니다. 이 말씀은 열왕기하 4장에서 엘리사가 소년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너무나 급하기 때문에 게하시에게 인사도 하지 말고 받지도 말라고 지시하시는 것과 비슷합니다. 열왕기하 4:29절에 보면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엄격함, 곧 열두 제자 혹은 초대 교회에 요구된 것보다 더 엄격한 요구 사항은 70인 제자들의 사명에 독특하게 나타납니다. 그만큼 추수의 긴박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상 예수님의 이 네 가지 명령은 70인 제자들이 예수님만 의존하고 그들이 전파하는 말씀에만 의존할 것을 강조합니다. 만일 70인 제자들이 많은 것을 챙겨서 파송을 받는다면 그들에게 믿음이 없어도 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부족한 것이 생길수록 강한 믿음도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추수하는 주인에게 의존하게 되며, 자신들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에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전도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오직 우리를 보내신 추수하는 주인이신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오직 우리 주님과 하나님 나라를 의존하여 전도인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시대 추수하는 즐거움에 참예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 5-7절을 보면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고 합니다. 전대나 주머니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70인 제자들에게 “아무 집에 들어가든지 평안을 빌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으며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기초해서 볼 때 보냄을 받은 70인 제자들의 사명지는 길과 시장이 아니라 각 가정입니다. 가정에 평화를 빌고, 식탁에 앉고, 주인이 베푸는 것을 먹고 마시고,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는 이런 지시는 제자들의 선교가 길거리 노방전도나 부흥회 같은 프로그램보다는 관계적인 선교임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의 가정과 특히 식탁은 유대의 공동체적 생활에서 가장 소중하게 보존한 문화입니다. 식사하는 공간에 들어간다는 것은 가장 내밀한 영역에 접근하도록 허락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70인 제자들의 사명은 대중 집회나 전략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서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표현한다면 관계전도입니다. 이 만남을 통한 신뢰의 관계 안에서 복음이 전파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계기도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식탁교제였습니다(24:30-3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집에 들어 갈 때에 먼저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라고 인사하라고 하셨습니다(5). 여기서 ‘평화’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가 ‘에이레네’(Eijrhvnh)인데 이 단어는 안위와 잘됨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살롬’(!/lv;)을 가리킵니다. 70인 제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 평화는 사실상 구원과 동의어가 됩니다(1:79; 2:14, 29; 7:50; 8:48, 42; 24:3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평안을 빌 때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가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합니다(6). 제자들이 빈 평화를 수용한다는 것은 그들이 제자들이 전한 하나님 나라를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그들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빈 평안을 거부하는 것은 제자들이 전한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평안을 빌 때 그 평안을 영접한 집에 유하며 그들이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7). 이는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감사함으로 환대를 받으라고 하는 것은 7-8절에 두 차례 언급됩니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그 시제가 현재 시제입니다. 이것은 주인이 공급하는 것을 계속해서 먹고 마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환대하는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이 제공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환대하는 그들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들과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하나님 나라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고 하십니다(7). 이 명령 또한 환대하는 주인들을 배려하는 행동입니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는 것은 집주인을 모욕하는 행위가 될 수 있으며, 그 환대가 마음에 들지 않음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실제적인 가르침은 초대 교회에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특히 7절에서 일하는 사람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원리는 사도 바울의 삶에서 나타납니다. 고린도전서 9:4-14절에 보면 바울은 자신의 선교활동을 변호하기 위해 오늘 본문의 7-8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대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14절을 보면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영접하는 자들의 대접만 받을 것이 아니라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병자들을 고치라’는 말에서 ‘고치라’는 말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그 기본형이 ‘데라퓨오’(qerapeuvw)인데 보통 신약에서는 치유를 의미하지만 치유뿐 아니라 섬기는 것도 함의합니다. 또한 ‘병자’는 ‘아스데네스’(ajsqenhv")인데 역시 아픔과 질병을 자주 의미하지만 어근은 단순히 ‘악함’ 혹은 ‘무능’을 뜻합니다. 따라서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라는 말은 단순히 의술적 치료에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측면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치고 섬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웠다”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70인 제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지와는 새로운 혹은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선포한 동일한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나라를 혁신하거나 자신들의 여건에 맞게 나라를 맞추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증인과 청지기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70인 제자들의 메시지를 듣고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듣고 영접하는 것이며, 70인 제자들의 메시지를 거절하는 것은 예수님과 그를 보내신 성부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70인 제자들이 전할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뿌리는 이사야 40-66장에 있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나라에 대한 선언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누가복음 4: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이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글’은 누가복음 4:18-19절 말씀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사야 61:1절 이하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부터 재림까지 교회의 본질적인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시작한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실현돼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행위로 시작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 곧 구원의 행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재림의 최종 절정까지는 완전히 실행되지 않은 상태로 있지만 이 나라는 이미 예수님이 선포한 것이고 실제로 예수님을 통해 임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엥기제인, #Hggiken)는 주제가 누가복음의 후반부에 나타난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70인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 것(10:9, 11)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초점을 맞추는 것(18:35, 40; 19:29, 37, 41; 21:8, 20, 28)은 헬라어 단어 ‘엥기제인’(가까왔다)으로 묘사합니다. 이 단어는 교회의 선포와 예수님의 길에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줍니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에 있는 예수님의 길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선포 곧 복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시작한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작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나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나라가 이 세상에 실현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70인 제자들이 전한 하나님 나라를 영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10-11절을 보면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개적으로 그들의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선언하라고 합니다. 이런 행위는 영접하지 않은 도시 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팔레스타인 밖을 여행하는 유대인들은 집으로 돌아올 때 이스라엘 땅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발에 먼지를 떨어야 했습니다. 70인 제자들의 이런 행위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반응하지 않는 유대인 마을을 본질적으로 이교도의 마을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12-15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는 도시보다 심판의 날에 소돔이 더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옛 원수인 두로와 시돈이 고라신과 벳세다에서 행하신 기적을 보았다면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이 다 갈릴리 지역 마을들 입니다. 이 마을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도 보았습니다. 벳세다 같은 경우는 오병이어의 기적도 보았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멸망의 자식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가 이 종말의 때에 곧 추수 때에 힘써 복음의 증인으로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추수하는 즐거움에 참예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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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 [누가복음 7장]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살려주신 예수님 file 손재호 2020.05.03 138
716 [누가복음 7장] 백부장의 믿음을 축복하신 예수님 file 손재호 2020.04.25 153
715 [누가복음 6장]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file 손재호 2020.04.18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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