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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눅 10:25-37

2020년 누가복음 공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말씀:누가복음 10:25-37

 

우리는 지난 시간에 70인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하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 말씀은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묻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사의 질문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율법사’는 원문으로 보면 ‘노미코스’(nomikov")인데 이는 율법을 잘 알고 율법을 가르치도록 위임받은 서기관들 중에서도 출중한 부류 즉 동급의 사람들 중에서도 최고를 가리킵니다. 이런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하기를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이 율법사는 영생을 얻는 길을 알지 못해서 묻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율법사는 율법 전문가입니다. 그것도 출중한 서기관 중에서도 최고의 율법사라면 능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사는 아마도 예수님께 건방지고 위선적인 태도로 질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보면 지극히 율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런 질문은 1세기 유대교에서 흔히 있었던 질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 보면 동사는 과거형이며, 한 번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곧 “내가 어떤 것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의미입니다. 만일 이 동사의 시제가 한 가지 행위를 의도하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스스로 계산해 볼 수 있는 어떤 행위를 의도합니다.

 

그러면 이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율법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7절에 보면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이 대답은 신명기 6:5절과 레위기 19:18절을 결합해 대답한 것입니다. 신명기 6:5절을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19: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토라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 둘 다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이것이 율법의 강령입니다. 율법사가 자기 전공분야이니 완벽하게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오늘 본문 28절에 보면 이에 예수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다”고 하시면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서 영생을 얻을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이 율법사에게 이것을 지키면 살리라고 하신 것입니까? 율법사가 영생 얻는 길을 율법을 통해서 잘 알고 있고 또 그것을 실천도 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원래 정신 앞에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이 율법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왜 우리 인간이 스스로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구원하시는지를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고 계신 것입니까?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그 길은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만이 자기 백성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사에게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잘 지켜 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9절에 보면 이런 그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이렇게 묻는 그의 이면에는 자신은 이웃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한 이웃이 누구라고 정해 주기만 하면 그 이웃도 자기 몸처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잘 지켜 왔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예를 들어서 답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0-37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m에 위치 해 있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 29km 떨어진 곳에 위치 해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250m 낮은 지형에 위치 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꼬불꼬불 했고 마을은 가파르고 울퉁불퉁한 언덕에 있었습니다. 이 언덕에는 군데군데 동굴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동굴에 강도들이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런 강도들이 상당히 많아서 무장을 해야 지나다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처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악명 높았다고 합니다. 강도들이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강도 만난 자에게 도와줄 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누가 지나갔습니까? 제사장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이 길을 지나가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했던 대부분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유대와 여러 도시와 마을에 거주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이 위치한 도시입니다. 거기에 많은 제사장들이 거주했을 것입니다. 아마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은 예루살렘에서 성전 제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제사장이 지나가는 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는 희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라면 당연히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도와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상처 입고 쓰러져 있는 여행객을 보고 그를 피하여 지나가버렸습니다. 제사장이 지난 간 뒤에 이번에는 다행히도 레위인이 다가옵니다.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제사장들을 보조하고, 제사를 준비하고, 성스러운 뜰과 그릇을 청결하게 하고, 기구들을 운반하고, 문을 지키고,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을 맡아 섬겼습니다. 이런 레위인이 지나간다는 것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그런데 레위인 역시 제사장처럼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 버렸습니다. 강도 만난 자에게 이제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때 누가 지나갔습니까? 어떤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3절에 보면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참으로 충격적인 전환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핵심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지나가는 사람을 일반 백성이 아니라 그것도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그냥 지나가 버렸지만 사마리아인은 상처 입고 쓰러진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를 돌봐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34-35절에 보면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버렸지만 유대인들이 멸시한 사마리아인은 다가와 온갖 정성으로 돌봐 준 것입니다.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돌봐 주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하지 않은 것을 한 것입니다.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고 여러 가지 손해를 볼 수도 있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 돌봐 주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제사장과 레위인과 달리 예루살렘 성전에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유대인으로서 동일한 하나님을 경배했고, 동일한 예식과 절기를 지켰고, 토라를 읽었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산이 아니라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심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사마리아인들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해 수 세기에 걸쳐서 통혼을 함으로써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적대적이었습니다(요 4:9).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인들은 한 동족이요, 주변인들이 아니라 원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이런 사마리아인의 등장은 이제 쓰러져 있는 강도 맞은 사람의 운명은 죽을 운명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도 도와주지 않고 지나갔다면 사마리아인은 당연히 지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가와 정성을 다해 돌봐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의 도움으로 강도 만난 자가 살아났다는 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한 후에 율법사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36). 이에 대한 율법사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7절에 보면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했습니다. 율법사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인이라고 표현하고자 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의 이 비유의 교훈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상당히 어려움에 봉착해 있음을 말해 줍니다. 율법사는 사마리아인이 진정 이웃이라고 인정하지는 못하여도 적어도 이웃됨이 무엇인지는 인정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37).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37). 이것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본질적으로 두 번째 계명 곧 이웃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푸신 분이 누구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자비한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을 따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서로 돌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사랑의 결국은 하나님 사랑으로 연결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이웃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은 자기 사랑이지 하나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난 사랑이라야 하나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율법을 따라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한다는 율법사의 사랑은 어느 정도의 사랑인 것입니까? 누가복음 6:27-33절을 보면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도 하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지금 율법사가 한다는 그런 사랑은 죄인들도 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합니다. 강도 만난 자의 입장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웃의 도움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7장에서는 율법과 선지자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7: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참된 이웃은 누구입니까? 누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습니까? 누가복음 11:21-22절을 보면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고 했습니다. 마치 강도 이야기 같습니다. 강한 자가 지키고 있을 때에 다른 자가 빼앗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이기면 그의 소유를 빼앗아 나온다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다 마귀라는 강도에게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죄와 사망의 그늘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 무엇이 자비입니까? 그들이 대접받고 싶은 것은 그 강도에게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허물과 죄로 죽어 있기에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 오신 참된 우리의 이웃을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오히려 그를 대적하여 죽여 버렸습니다. 십자가 말고 다른 것 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실 수 있는 것이 십자가라고 하자 그러면 너 죽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죽인 강도들 입니다. 예수님 죽이는 일에 공범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실 분이 계십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며 살아왔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셨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자기를 사랑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강도란 말입니다. 천지만물이 다 주님의 것인데 마치 자기 것인 양 여기면서 지금도 그 소유를 더 늘리기 위해 이웃을 헤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 소유 늘리는 일은 재물만이 아니라 명예나 자존심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남을 나보다 낮게 여기며 사는 것이지 언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겼습니까? 이런 강도들의 세상에서 참된 이웃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이 자비를 베풀기 위해 오신 분이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분이 오시니 그동안 우리끼리 사랑하면서 지낸 것이 다 강도들의 사랑밖에 되지 않은 것입니다.

 

율법사의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까? 자비를 베푸는 자가 이웃인데 자신이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까? 율법사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서 의에 이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결국 참된 이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이웃은 자비를 베푸신 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이 되시기 위해서 십자기를 지시는데 이 일에 인간은 무슨 역할을 하였습니까? 누가복음 22:52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고 하셨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강도처럼 잡기 위해 왔습니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입니다.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힘을 보태기는커녕 방해만 되는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앞장 선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 일에 세상의 권력은 함께 동조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하지 않습니까? 나의 필요를 채워달라고 하는데 주님은 십자가를 내 미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우리는 밀쳐내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들에게 주님은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자비의 대상이 된 자들은 자신이 강도임을 아는 자입니다. 내가 강도 만난 자 정도가 아니라 내 자신이 강도인데 이런 강도를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의 한편의 강도처럼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이런 자비를 받은 자는 이런 자비를 베푸신 참된 이웃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을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가 따릅니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영생 곧 우리의 생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을 사랑하면 이 사랑을 함께 받은 형제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 마음과 성품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고 그 영생을 누리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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