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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눅 11:1-4

2020년 누가복음 공부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말씀:누가복음 11:1-4

 

오늘부터 우리는 누가복음 11장 말씀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1-13),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하는 자들에 대한 가르침(14-28),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책망 하시며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29-36),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화를 선포하시는 예수님(37-54)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1-4절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는 사건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서에 보면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오늘 본문과 마태복음 6장 두 곳에 나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6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과 비교해 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6:9-13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본문과 비교해 보면 누가복음에서 다루어지는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은 분량 면에서 마태복음의 삼분의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며 기도하라고 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그냥 ‘아버지여!’라고 하며 기도하라고 합니다. 또한 누가는 마태복음의 하나님께 드려지는 첫 번째 두 송영 곧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포함하지만 세 번째 송영 곧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내용은 생략하고 있습니다. 또한 누가는 마태복음의 네 청원 곧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중에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를 빼고 있습니다. 이처럼 누가복음에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 마태복음에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이 차이가 납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에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산상수훈 안에 배치하고 있는데 반해서 누가복음의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태복음에서 가르쳐 주신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와 오늘 본문 누가복음에서 가르쳐 주신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상호간의 관계성에 대해서 논쟁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 복음서 간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지명이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택하여 세우실 때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9:18절에 보면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 따로 기도하셨습니다. 9:28절에 보면 변모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되실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습니다. 22:44절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감람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의 흐름을 보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는 거대한 중앙부분 전체를 다루는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후에 기도가 나오지 않다가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에 가서야 감람산에서 예수님의 최후의 절정의 기도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22:39-46).

 

당시 랍비의 제자들은 유명한 랍비에게 기도를 가르쳐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배우는 기도는 랍비학교의 특징을 나타냈고 다른 학교와 구별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 나아와서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하며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여!’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직접적이고, 꾸밈이 없고, 심지어 대범한 표현입니다. 당시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부르도록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마태복음에서와 같이 ‘하늘의’와 같은 형용사를 붙이지 않고는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당연히 ‘아버지’로 표현되지만(출 4:22; 신 32:6; 렘31:9; 말 2:10 등), 사람들이 실제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통 개인의 아버지보다는 민족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 배경과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여’라고 하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한 것은 세례부터 십자가 처형까지 예수님의 사역 전체에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인식은 10:21-22절에 강하게 표현됩니다. 10:21-22절을 보면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그의 권위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리고 초기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오래된 확신 중에 하나였습니다. 마가복음 14:3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바’라는 말은 아람어로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아바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대부분의 혹은 모든 내용 배후에 있었던 인식을 반영해 줍니다. 따라서 이 칭호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예수님이 선호한 독특한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주’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대중적인 설교에 광범위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표현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인용이나, 이야기적인 묘사나, 예수님 외의 화자가 전하는 강화나, 적대자들에게 전한 예수님의 말에 ‘아버지’가 사용된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서든지, 아니면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에서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은 모두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예수님 외에 하나님을 ‘아바’라 부른 유대 랍비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확신 있게 그리고 편안하게 ‘아바 아버지여!’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부르도록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여!’라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을 보면 먼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 기도는 송영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첫 번째 송영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이 말은 원문으로 보면 명령형으로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라는 말입니다. 히브리 세계에서 이름은 아무렇게나 붙이는 별명이 아닙니다. ‘아버지’(pathvr, 파텔)는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본질로 존중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히 여기다’(aJgiavzw, 하기아조)라는 말은 ‘성스럽게 하다’, ‘거룩하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거룩’은 구별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신들과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진 상태를 전제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진 상태는 어떤 경우를 말할까요? 예레미야 34:14-16절을 보면 “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렸거든 칠년만에 너희는 각기 놓으라. 그가 육년을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케 할지니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나를 듣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이제 돌이켜 내 목전에 정당히 행하여 각기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하되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 언약을 세웠거늘. 너희가 뜻을 변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고 각기 놓아 그들의 마음대로 자유케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서 너희 노비를 삼았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유대인들이 노예를 풀어주지 않아서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려면 노예를 풀어주라고 명하신 율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에스겔서 36:16-23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 고토에 거할 때에 그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소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의 위에 쏟아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열방에 헤쳤더니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인해 벌을 받아 이방인들에게 포로로 잡혀 감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졌다고 합니다. 곧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을 비는 기도이자, 하나님의 백성이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을 비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성스럽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규정하는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레 11:44; 21:8; 22:31-33; 시 99:1-3).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두 번째 송영이 무엇입니까? “나라이 임하옵시며”입니다. 이 말씀도 역시 원문으로 보면 명령형으로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강력히 임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계시하실 것인지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리고 심지어 인간의 뜻과는 반대로 이 나라를 이미 계시하셨습니다(요 1:1-14). 문제는 인간이 과연 이 나라를 영접할 것인지 여부입니다. 송영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찬양인 동시에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고백하고, 영화롭게 할 것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먼저 아버지 하나님과 깊은 사랑과 신뢰 속에서 이 송영의 기도 곧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송영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 개의 청원을 가르쳐 주십니다. 3-4절을 보면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고 했습니다. 세 개의 청원 중에 첫 번째 청원을 보면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다’의 시제가 과거형으로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계속해서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양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가 ‘아르토스’(a[rto")인데 히브리어 ‘레켐’(!j,l,)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레켐’은 빵을 가리키지만 대개는 음식 전반을 지칭할 때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청원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음식을 포함하고, 음식 외에도 사치품이 아닌 생필품도 포함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일용할 양식’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로 ‘일용할’로 번역하는 ‘에피우신’(ejpiouvsion)은 신약에서 이곳과 마태복음의 주기도에서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왜 일상의 개념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아마도 일반적이지 않은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6:11절에 보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했는데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 보면 간주가 붙어 있는데 간주에 보면 ‘내일 양식을’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간주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오늘 우리에게 내일을 위한 우리의 양식을 주소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의 나라 안에 있는 우리에게 주실 양식을 오늘 주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첫 번째 이 청원을 종말론적 의미에서 해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제자들은 미래의 약속에 따라서 현재를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 따르면 첫 번째 청원은 앞의 두 송영과 일관성을 보입니다. 두 송영은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들이 실현되도록 특히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청원 곧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이 청원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따라 현재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위한 청원은 현재 물질의 복을 간구하는 기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이 땅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로 미래의 약속을 통해 현재를 볼 수 있도록, 영원한 윤리에 따라 이 땅의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간구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입니다(4).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을 살아갈 때에 음식과 생필품이 없이 살아갈 수 없듯이 용서 없이 살 수도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 사실을 음식과 생필품처럼 덜 느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복수와 보복의 세상은 공포와 두려움의 세상입니다. 용서의 세상은 생명과 평화와 소망의 갱신이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용서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12절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에 보면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에 간주가 붙어 있는데 간주에 보면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옵시고’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도 보면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라고 했을 때 간주가 붙어 있는데 간주에 보면 ‘빚진 모든’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빚’은 갚아야 할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다시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습니다. 누가는 여기서 두 가지 죄에 대해서 말합니다. 원문으로 보면 앞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이라고 할 때 죄는 ‘옵헤일로’(ojfeivlw)입니다. 이것은 갚아야 할 무엇 곧 태만의 죄를 말합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할 때 죄는 ‘하말티아’(aJmartiva)입니다. 이는 죄를 지칭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이 용어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죄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됩니다. 이것은 죄를 행한 것일 수도 있고 무엇을 행하지 않은 태만의 죄 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누가가 신학적 의미를 다르게 하려고 두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다면 하나님이 용서하셔야 하는 우리의 죄는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다른 사람들의 죄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반대하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하거나 요구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은 용서의 대상일 뿐 아니라 용서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그 사랑을 덧입은 자들은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타내야 합니다.

 

세 번째 마지막 청원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입니다(4). 여기서 ‘시험’ 곧 ‘페이라스모스’(peirasmov")는 ‘유혹’보다는 ‘시험’으로 번역하는 것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에 들도록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 번째 청원은 약함의 고백이면서 동시에 신실함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청원은 신자들로 하여금 신앙의 영웅이 된 체하는 허세를 부리지 않도록 만듭니다. 우리 신자들은 자신들이 의로운 사람들인지 증명할 기회를 달라고 하나님을 자극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개입하지 않으시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처지로부터 구출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우리를 구출해 달라고 겸손히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두 번이나 반복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40절에 보면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또한 46절에서는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고 하나님께 청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송영과 매일의 필요를 위한 청원으로써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전제로 합니다. 기도는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하며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 안에서 우리의 시간과 인격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의미를 바르게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그 기도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바른 기도를 드려 나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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