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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눅 12:49-59

2021년 누가복음 공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말씀:누가복음 12:49-59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아니하는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시는 말씀을 살펴봤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본문 말씀은 “내가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35절에서 시작한 종말론적 주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49-50절을 보면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불을 던지려 오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땅에 던지실 ‘불’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용례를 통해 볼 때 ‘성령’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2:3절을 보면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누가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모습을 불의 혀 같이 갈라져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49절에서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했는데 이 말은 ‘성령이 세상에 임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용서 받지 못할 것입니다. 12:10절을 보면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심은 곧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5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암시합니다. 50절을 보면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받을 세례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받을 세례는 십자가 고난을 가리킵니다. ‘세례’는 물과 관련이 됩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물은 재난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편 42:7절을 보면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사야 43:2절을 보면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에 보면 ‘물’은 메시아의 고난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 헬라어에서 ‘세례를 받다’(baptivzomai)라는 단어는 재난을 당하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세례’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6:3-4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세례’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가 죽음과 관련된 용어로 쓰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던지려 오셨습니다. 곧 세상에 성령으로 세례를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 먼저 자신이 고난과 죽음의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명을 다 이루기까지 매우 답답하셨습니다. 곧 힘드셨습니다.

오늘 본문 50절을 다시 보면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답답하다’라는 말을 원문으로 보면 ‘쉬네코마이’(sunevcomai)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환경의 힘에 의해 곤궁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빌립보서 1:23-24절에 보면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하는 말인데 자신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욕망과 빌립보 성도들과 함께 있고 싶은 열망 사이에 끼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두 사이에 끼었으니’라고 할 때 ‘끼었다’라는 말이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쉬네코마이’(sunevcomai)입니다. 그러므로 50절에서 ‘쉬네코마이’(sunevcomai) 곧 ‘답답하다’는 말은 누가복음의 중앙 단락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는 장면의 핵심 주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세례’를 받기 위해서 곧 자신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첫 번째 목적을 완성하기까지 중압갑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보냄을 받은 것을 구원론적인 측면에서 말합니다. 마가복음 1:38절에 보면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50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보냄을 받은 사명의 더 큰 그림을 보여줍니다. 구원론적 사명 곧 예수님께서 전도인으로 보냄을 받은 것은 자신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큰 사명의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보냄을 받은 궁극적인 사명은 ‘불’과 ‘세례’를 포함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곧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5:22-25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은 권세들과 주관자들 곧 마귀를 멸하시기 위함입니다. 요한일서 3:8절을 보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불’과 ‘세례’의 이미지를 종말론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누가복음 3:9절을 보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3:16-17절을 보면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도 ‘불’과 ‘세례’를 종말론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자신이 먼저 십자가에서 죽음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구약적 표상으로 불의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저주 아래 온 자들, 즉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이야기는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에게나 다 거리끼고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고전 1:18-25).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니 세상에서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는 현장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과 심판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오해하지 않도록 부연 설명을 합니다. 오늘 본문 51-53절을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평화를 주려 오신 것이 아니라 분쟁케 하려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게 된다고 합니다. 52절에서 ‘이 후부터’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 하신 후 성령을 보내신 후를 말합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분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한 가정이 다섯이면 둘과 셋이, 아버지와 아들이, 어미와 딸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분쟁이 일어납니다. 세상에도 이런 분쟁이 일어납니다. 대부분의 분쟁은 자기들 이해관계로 인해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불을 던지시면 왜 가정에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평화를 주려 오신 것이 아니라 분쟁케 하려 오셨기 때문입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0:34-36절을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53절 말씀은 미가서 7:6절 말씀을 반영합니다. 미가서 7:6절을 보면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불을 던지로 오신 것은 선지자들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불의 심판 가운데서 구원받는 자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집안의 원수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는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면 이런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0:37-39절을 보면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가정에 일어나는 이런 분쟁은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다른 것을 사랑하느냐의 싸움입니다. 곧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가정을 사랑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가정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가족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로 인해 가족들 간에 분쟁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가정들 가운데 이런 분쟁들이 이미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쟁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화평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분쟁을 위해 오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합당한 자를 갈라내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자도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쫓지 않는 자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로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멸망의 자식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얻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고 누리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불을 던지러 오셨습니다. 화평을 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분쟁케 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인해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종말의 현상인 것입니다.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2천 년 전에 이 땅에 불이 던져졌습니다. 그 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서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인해 가족들 간에도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불을 던지고 계십니다. 이로 인해 지금도 가족들 가운데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예수님으로 인해서 가족들 간에 분쟁이 있을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 복음을 믿는다면 분쟁은 필연적으로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곧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습니다. 초림이 종말임을 입증하는 사건이 재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종말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종말의 특징을 말씀하셨습니다. 종말에는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쟁케 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종말을 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54-56절을 보면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오늘날이나 예수님 당시나 사람들은 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농사를 짓는 농부나 고기를 잡는 어부들에게 있어서 일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은 구름이 일어나고 바람이 부는 것을 통해서 일기를 읽어냅니다.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나면 소나기가 올 것을 알고, 남풍이 불면 무더울 것을 압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이와 같은 천지의 기상을 잘 분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시대는 분변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56). 여기서 ‘시대’라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카이로스’(kairov")인데 이 말은 ‘기간’이 아니라 ‘기회’를 의미합니다. 곧 파종할 때, 추수할 때, 감사할 때, 돛을 올리고 내릴 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카이로스’는 시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계절에 대한 것, 어떻게 계절을 인식할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라고 표현함으로써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그의 가르침과 치유와 선교를 통해서 즉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현재 임해 있으며, 이 나라는 결단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종말의 때입니다. 종말의 때는 곧 심판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예수님을 믿을 때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57-59절을 보면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소하는 자와 고소 당하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회개의 필요성을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 가기 전에 길에서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판장에게 끌려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서 넘겨주고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고 합니다. 호리라도 남김없이 갚지 않으면 결단코 거기서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관속’은 원문으로 보면 ‘프락토르’(pravktwr)인데 ‘집행관’을 말합니다. 그리고 ‘호리’라는 말은 ‘렙톤’(leptovn)을 말하는 데 팔레스타인 땅에서 사용된 로마 화폐 중에서 가장 작은 단위를 말합니다. 이렇게 작은 것까지 해결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이 오기 전에 하나님께 진 죄의 빚을 탕감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죄의 빚을 탕감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죄를 탕감 받기 위해서는 먼저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는 말로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며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나를 위하는 모든 것이 다 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죄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힘으로 가능합니까? 우리의 노력으로 가능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한 호리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님,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주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종말에 살고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셨음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 주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을 받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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