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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눅 13:10-21

2021년 누가복음 공부
                                                          안식일에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말씀:누가복음 13:10-21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 의해 죽임 당한 갈릴리 사람들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임을 당한 사건을 통해서 회개치 아니하면 망한다고 하시는 말씀을 살펴봤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십 팔년 동안 귀신에 사로잡혀 꼬부라진 한 여자를 고쳐 주시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0-13절을 보면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거기에 십 팔년 동안 귀신에 사로잡혀 앓으며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고 하시며 안수하여 주셨습니다. 이에 그 여자가 꼬부라진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귀신에 사로잡혀 십 팔년 동안 앓으며 꼬부라진 여자를 고쳐 주신 것은 아마도 예배가 끝난 후에 있었던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유대 회당의 예배 장소에는 들어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회당 예배 설교를 마치신 후에 이 여자를 보시고 고쳐 주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여자는 십 팔년 동안 귀신에 사로잡혀 앓고 있었으며 허리가 꼬부라져 조금도 펼 수 없었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는 이렇게 묘사된 질병이 없습니다. 신체의 기형이 있는 사람들은, 특히 여성인 경우라면 공개적인 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랍비에게 다가가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였고, 원칙적으로 랍비들은 여자들에게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비참한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건내셨습니다.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보시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 팔년 동안 귀신에 사로잡혀 앓으며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를 보시고 먼저 말을 걸고 ‘네 병에서 놓였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이 선언 곧 “네 병에서 놓였다”(ajpolevlusai, 아폴렐뤼사이)는 2인칭 단수 완료 수동태 직설법입니다. 곧 여자가 병에서 풀려난 것은 이미 일어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병에서 풀려난 것은 구원하시고 해방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동태로 기록된 것은 그녀의 회복이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 팔년 동안 귀신에 사로잡혀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던 여자를 고쳐주신 이 사건은 기독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 치유를 선언하시고 나서 손을 그녀에게 얹어 안수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손을 얹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리는 경우(출 29:10, 15; 레 1:4; 3:2, 8, 13)와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임명하는 경우(민 8:10), 그리고 복을 구하는 경우(창 48:17-22; 민 27:18, 23; 신 34:9)입니다. 구약에서 치유와 관련해서 안수가 언급 되는 유일한 예는 아람 장군 나아만이 엘리야가 치유를 위해서 안수해 주기를 열망한 사건입니다(왕하 5:11). 구약에서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포함해서 힘을 상징할 때가 많습니다. 짐승이나 사람에게 손을 얹는다는 것은 부정한 상태에서 거룩한 상태로 성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안수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손을 통해서 거룩한 능력이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진 여자에게 전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치유를 선언하시고 안수하자 여자의 건강 상태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던 여자의 몸은 곧게 펴졌습니다. 이 놀라운 치유의 역사를 경험한 여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13).

그런데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고 분을 내었습니다. 14절에 보면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본 회당장은 분을 내어 무리에게 말하기를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고 했습니다(14). 4복음서에서 오늘 본문은 유일하게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안식일 치유를 반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언급합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에게 한 것이 아니라 무리들에게 이 말을 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무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반대하도록 자극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병자가 고침을 받는 것은 의료행위이기에 노동에 속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이란 엿새 동안 얼마든지 해도 되는데 왜 이렇게 거룩한 안식일에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4절에서 회당장의 말 곧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라는 말에서 중요한 헬라어 단어는 ‘dei'’(데이) 곧 ‘해야 한다’입니다. 회당장은 병 고치는 일은 안식일 규례를 따라 안식일이 아닌 엿새 동안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당장에게 있어서 신앙의 뿌리와 본질은 토라의 규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회당장은 무리를 향해 예수님에 대한 불평을 쏟아 냈으나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15절을 보면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말한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6:5절에 보면 누가는 이미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6:5). 그러므로 오늘 본문 15절에서 예수님을 ‘주’로 칭한 것은 의도적으로 사용한 칭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안식일에 대한 주장을 논박할 때 단순히 랍비의 견해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의견에 문제가 있다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회당장의 견해는 랍비들이 짐승들에게 자유롭게 허락한 것을 사람에게는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15). 당시 곤경에 처한 짐승을 불쌍히 여기는 점에 있어서는 랍비 전통이 일치된 의견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도 자기들의 소나 나귀를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였습니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식적인 이해를 14:5절에서도 다시 한번 그 근거로 삼습니다. 14:5절에 보면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에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곧 끌어냅니다. 이처럼 곤경에 처했을 때 소나 나귀와 같은 짐승에게도 불쌍히 여기고 구하며 물을 먹이고 풀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짐승에게도 이렇게 배려하면서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사로잡혀 고통 하는 아브라함의 딸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신 후에 사단에게 매인바 된 아브라함의 딸을 푸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16절을 보면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먼저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참 자녀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단에 사로잡혀 꼬부라진 이 여자를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딸이기에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4절에서 사용한 ‘dei'’(데이) 곧 ‘해야 한다’를 여기서도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16절을 다시 보면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했습니다. 14절에서 회당장이 안식일 준수와 관련된 최종 권위를 토라에 두었다면,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 토라를 대신합니다. 사단을 물리치고 사단의 처소를 공격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보냄을 받은 핵심 목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입니다. 요한일서 3:8절을 보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단에 사로잡혀 꼬부라진 여자를 해방시키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창조 사역을 안식일에 마친 것과 같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해 참된 안식을 완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명과 하나님 아버지의 사명은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10:22절에서 선언한 것과 같이 이 사명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0:22절을 보면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에 사로잡혀 꼬부라진 여자를 안식일에 치유한 행위는 안식일 규례를 위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냄을 받은 목적을 이룬 것입니다.

이사야 61:1-3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주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주가 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토라를 대신하고, 안식일을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식일의 본질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안식일의 본질은 하나님의 일을 연기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사단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아브라함의 딸을 해방하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셨습니다. 사단의 권세에 사로잡혀 안식이 없는 여자에게 참된 안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실현되자 또 한 번 분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모든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였습니다. 17절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원수들이 수치를 겪게 될 것 곧 이사야 45:16절에서 언급하는 “우상을 만드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며 욕을 받아 다 함께 수욕 중에 들어갈 것이로되”라는 말씀을 바꾸어 진술한 것입니다. 누가는 하나님의 일을 요약하는 동일한 주제와 심지어 어법까지 사용해 예수님의 일을 요약함으로써 이처럼 결정적이고 분리를 일으키는 안식일의 치유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알리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8절을 보면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것은 자신이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십 팔년 동안 안식을 누리지 못한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요한복음 5:1-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핍박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죄와 사단으로부터 놓임을 받게 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리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 18-21절을 보면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13장의 교차대구 구조의 중앙에 위치 해 있습니다. 교차대구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메시지는 중앙에 위치 해 있는 말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18-21절 말씀은 13장의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문맥의 흐름에서 보면 생뚱맞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이 두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비유가 사단에 사로잡혀 꼬부라진 여자를 치유 받은 장면에 곧이어 배열한 것은 그녀의 치유와 또 그것과 같은 비유들 곧 14:1-6절에 나오는 고창병 든 사람을 치유하는 사건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것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습니다. 그 씨가 자라서 나무가 되어 그 가지에 공중의 새들이 깃들었습니다(19). 이 비유는 마태복음 13:31-32절, 그리고 마가복음 4:30-32절에 비슷하게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18절에서 하신 말씀 곧 ‘하나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라는 말씀은 이사야 40:18절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40:18절을 보면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고 했습니다. 누가는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씨의 작음을 언급하는 대신에 씨가 채소밭 곧 정원에 심겨진 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채소밭에 대한 언급은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누가가 밭이 아니라 정원에 겨자씨가 심겨진 것을 예기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반대가 가장 집중 되어 있는 예루살렘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겨자씨 비유는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합니다. 그러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일차적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이방인도 하나님의 선민에 포함될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04:12절을 보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무 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발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새들이 가지에 깃드는 그림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선민에 포함될 것을 표합니다.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놀라울 정도로 성장한다는 것 외에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민족에게 주어질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또한 빵을 만들 때 사용되는 누룩의 역할에 비교됩니다. 누룩은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만듭니다. 누룩의 이미지는 출애굽 당시 무교절에서 온 것일 수 있습니다(출 12:18). 출애굽과 관련된 이미지라면 긍정적인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제외한 말씀에서 묘사하는 누룩에 대한 모든 내용은 은유적으로 사용될 때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나쁜 의도를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누룩의 은유적인 특질보다는 물리적인 특질을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누룩과 같이 하나님 나라는 시작 단계에서는 식별이 되지 않지만 시작되고 나면 반죽 전체를 부풀려 버리는 것처럼 반드시 일어나고 이를 막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루 서 말’은 약 40리터의 밀가루에 해당됩니다. 백 명은 족히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누룩의 미세한 양은 이처럼 가루 서 말을 다 부풀려 버리듯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미약하게 시작하지만 엄청나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는 둘 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로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겸손하고 하찮게 보이는 모습으로 시작하십니다. 처음에는 미미하게 보이거나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시간이 되면 부정할 수 없을 정도에 엄청나게 성장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이 두 비유의 강조점은 하나님 나라의 미약한 시작에 있습니다. 미약한 시작은 지금 숨겨져 있고 사람들에게 쉽게 외면당합니다. 그로인해 당시 유대 지도자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었던 제자들은 낙심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기 쉬운 제자들에게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를 통해서 유대 지도자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가 전진해 갈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제자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비난하고 방해해도 하나님 나라는 중단 없이 전진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 나라가 그 시작은 미약하지만 겨자씨가 자라 공중의 모든 새들이 깃들듯이,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하듯이 놀랍게 성장함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심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어떤 핍박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게 하시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시고 우리가 그 영광에 참예 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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