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7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눅 13:22-30

2021년 누가복음 공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씀:누가복음 13:22-30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십 팔년 동안 귀신에 사로잡혀 앓으며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를 고쳐주신 사건을 살펴봤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각 성과 촌에 다니시며 가르치실 때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까”하며 묻는 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2-23절을 보면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시는 길에 각 성과 각 촌으로 다니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 당시에 논쟁의 주제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어느 랍비에게나 물어 볼 수 있는 그런 질문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이 질문에 대한 견해로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배타적으로 이해하는 것까지 다양했다고 합니다. 어떤 랍비들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어떤 랍비들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서 오는 세상을 만드셨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중앙 단락(9:51-18:35)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행해서 올라가는 길에 있었던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이 중앙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 나아와서 질문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지만 예수님을 ‘주여’(퀴리에, Kuvrie)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이거나 아니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는 어떤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와서 “주여! 구원 얻을 자가 적으니이까?”하고 묻는 그들에게 즉답을 하지 않으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원 얻을 자가 많은지 적은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대답해 주지 아니하시고 ‘너희에게’ 즉 몰려 온 사람들을 교육하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몰려 온 사람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인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인간의 노력이 요구된다는 관점에서 질문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질문자는 제자도의 엄격함을 해소해 줄 것을 소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들어가기가 힘들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다시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힘쓴다’라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아고니제스테’(!Agwnivzesqe)라는 말인데 이 말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이곳에서만 나옵니다. 이 ‘아고니제스테’(!Agwnivzesqe)는 제자에게 요구되는 노력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운동시합이나 전투에 참가한 것을 의미합니다. 곧 운동시합이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죽기까지 용감히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곧 구원을 얻기 위해서 마음과 영혼을 다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죽기 살기로 순종하는 태도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특징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해도 그런 고백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7:13-14절에도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좁은 문은 생명의 문이지만 그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합니다. 반면에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문도 크고 길도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합니다. 좁은 문 곧 생명의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습니다. 그러므로 힘쓰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좁은 문이 무엇입니까? 다시 오늘 본문 24절을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했는데 여기서 좁은 문은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7:13-14절에 기초해서 보면 생명의 길 곧 구원의 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기초해서 보면 그 길이 좁은 문입니다. 그런데 그 문으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을 쓰면 무조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애를 쓰고 힘을 다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해 놓으시고는 힘을 써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다고 하시는 것은 도대체 좁은 문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5:39-40절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영생은 누구나 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영생이 성경에 있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열심히 상고하였습니다. 거의 외우다 시피하고 성경에 대한 해석도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목숨을 걸고 성경을 필사하고 읽고 상고한 것은 영생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께로 그들이 나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알고서 불러 우리에 넣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이란 예수님이며, 예수님이 문이시기에 움직이는 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양이라야 예수님의 양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좁은 문이라는 것은 우리가 고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길로 간다며 온갖 고행을 한다고 해서 찾아지거나 열리는 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을 열고 닫는 권세가 집 주인에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27절을 보면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5절에서 좁은 문의 비유를 끝맺고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라고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25절의 이 말씀을 허술하게 추가한 것으로써 ‘좁은 문’의 말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7장에는 이와 같은 말이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하나의 은유를 하나 이상의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시켜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의 용례와 비슷하게 ‘닫힌 문’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마태복음 25:10절을 보면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고 했습니다. 사울 왕이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것과 사울 왕이 결과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당하는 것은 이런 ‘닫힌 문’의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삼상 28:15-19).

좁은 문을 통과 하려면 부단한 노력이 요구됩니다. 또한 안에 있는 집주인은 언제든지 문을 닫아 버릴 수 있습니다. 이는 12:58절과 13:6-9절에서 구원의 기회가 무한정하지 않다고 이미 제시한 동일한 주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금 문을 열고 있는 주인은 미래에는 닫아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히 여기지 말라는 이 경고는 14:15-24절의 ‘잔치 비유’에서 보다 자세히 반복합니다. 누가복음 14:15-24절을 보면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집 주인이 문을 한번 닫아 버리면 밖에서 아무리 두드린다고 해도 열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열어달라고 하면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고 하신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26-27절에 보면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7:21-23절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그렇게 큰 일을 한 사람도 예수님께서는 모른다고 하십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27절에서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는 이 말씀은 시편 6:8절을 인용한 것일 것입니다. 시편 6편은 고통 중에서 치유를 갈망하는 사람의 비탄입니다. 시편 6:6-8절을 보면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좁은 문의 비유 역시 비탄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들어가도록 문을 잡고 계십니다. 그러나 문 주위를 서성이지만 들어가지 않는 자들에게 선언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27). 구원의 문은 항상 열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닫힙니다. 사람들은 보다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유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이런 자들은 탄식하며 비탄에 빠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 28절을 보면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을 지체하거나 거부하는 자들은 밖에 남겨져서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탄식과 고통의 이미지는 마태복음에서는 여섯 번이나 등장하는 데 누가복음에서는 이곳에서만 등장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이 참여하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정반대의 비극적이고 끔찍한 모습입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28). 여기서 다시 언급되는 아브라함은 누가복음 13장의 교차대구 구조에서 16절의 ‘아브라함의 딸’과 대칭을 이룹니다. 누가복음 전체에서 아브라함은 특히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유대 공동체 전체를 가리킵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는 부단한 노력(24)과 ‘쫓겨난 자’들의 탄식(28)으로 이어지는 이 말씀은 23절에서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질문대로 적은 수가 들어감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29절에서 언급되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는 자의 언급은 적은 수가 들어감을 암시하는 말씀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29-30절을 보면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데 사람들이 동서남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적은 수가 들어간다는 비관적인 말씀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동서남북에서 오는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환희의 아이러니입니다. 여기서 ‘동서남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한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을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마지막 날에 열방이 동과 서에서 ‘급히 흐르는 강물같이’ 여호와께로 몰려 올 것을 강조합니다. 이사야 59:19절을 보면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이스라엘 출신이 아닌 민족들과 나라들이 여호와께 돌아올 것을 증언합니다. 이사야 43:5절에 보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9:12절에도 보면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시님’(!ynIysi)은 ‘먼 근동지역’, ‘알려진 세계의 맨 끝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앞에서 본 이사야 59:19절에도 보면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고 했습니다. 시편 107:3절을 보면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고 했습니다. 말라기 1:11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석하는 자들은 동서남북에서 모든 민족과 족속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9절에서 ‘잔치에 참석한다’라는 말은 ‘아나클리노’(ajnaklivnw)라는 말인데 이는 ‘비스듬히 기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누가복음에 단 세 번만 등장합니다(2:7; 12:37; 13:29). 이 단어는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님을 묘사할 때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7절을 보면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뉘었으니’라는 말이 바로 ‘아나클리노’(ajnaklivnw)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이 오늘 본문 곧 마지막 날에 동서남북 모든 민족들이 와서 종말론적 연회에 앉는 장면에서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베들레헴 구유에 인간과 함께 앉는 것을 계획하셨고(2:7), 하늘의 영원한 연회에서 함께 앉는 것을 계획하셨습니다(13:29). 이 두 연회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연회에 참석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기준을 완전히 뒤집어 버립니다. 오늘 본문 30절에 보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묻는 자에게 ‘동서남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합니다(29).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는 기이한 일인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52 [누가복음 14장] 고창병 든 자를 고쳐주신 예수님 file 손재호 2021.03.07 8
751 [누가복음 13장] 예루살렘을 두고 탄식하신 예수님 file 손재호 2021.02.28 59
» [누가복음 13장]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file 손재호 2021.02.21 74
749 [누가복음 13장] 안식일에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file 손재호 2021.02.14 82
748 [누가복음 13장] 너희가 회개치 아니하면 망하리라 file 손재호 2021.02.07 84
747 [누가복음 12장]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file 손재호 2021.01.31 83
746 [누가복음 12장]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file 손재호 2021.01.24 83
745 [누가복음 12장]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file 손재호 2021.01.24 75
744 [누가복음 12장]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file 손재호 2021.01.06 126
743 [2021년 신년 특강]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라 file 손재호 2021.01.02 104
742 [누가복음 12장]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주의하라 file 손재호 2020.12.21 122
741 [누가복음 11장]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화를 선포하신 예수님 file 손재호 2020.12.15 102
740 [누가복음 11장]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표적이 없다 file 손재호 2020.12.06 118
739 [누가복음 11장]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느니라 file 손재호 2020.11.30 134
738 [누가복음 11장]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file 손재호 2020.11.23 129
737 [누가복음 11장]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file 손재호 2020.11.15 100
736 [누가복음 10장]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file 손재호 2020.11.08 105
735 [누가복음 10장]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file 손재호 2020.11.01 112
734 [누가복음 10장]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file 손재호 2020.10.19 138
733 [누가복음 10장] 칠십인 제자를 전도여행 보내신 예수님 file 손재호 2020.10.12 11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 38 Next
/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