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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눅 15:11-32

2021년 누가복음 공부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비유
말씀: 누가복음 15:11-32

우리는 지난 시간에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를 살펴봤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세 번째 비유 곧 잃은 아들을 되찾은 비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1-12절을 보면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어느 날 아버지께 나아와서 ‘재산 중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유대관습에 따르면 재산은 남자 계통을 통해서 증여 되었습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은 분깃의 두 배를 받습니다(신 21:17). 따라서 두 아들을 둔 아버지는 재산의 2/3를 첫째 아들에게, 1/3은 둘째 아들에게 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자신의 몫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유산을 나눠 달라고 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둘째가 요구한 유산을 나눠 달라고 하는 데에는 유산의 양이 아니라 유산을 요구한 시도 자체와 그 유산을 요구한 시점이 문제입니다. 유산은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 실행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자식이 요구한다고 해서 그 유산이 할당되는 것이 아닙니다(민 27:8-11). 아버지가 살아 있을 동안에 재산을 분배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현명한 행위로 인정되지는 않습니다. 관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둘째가 유산을 요구한 것은 아버지와 가족 모두에게 수치가 되는 일입니다. 그가 유산을 요구한 것은 더 이상 가족 안에 살거나 가족에 의한 정체성을 유지하지 않겠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가능한 요구를 살아 있을 때 함으로써 사실상 아버지의 사망 확인서를 쓰고 있는 셈입니다. 고대 유대사회에서 이런 행위는 용서 받지 못할 죄입니다.

둘째 아들의 유산 분배에 대한 요구에 아버지는 여러 방법으로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을 설득할 수도 있었고, 아버지의 권위로 눌러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율법의 말씀을 내세워 거절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모든 방법을 포기하고 둘째 아들의 요구를 받아 드려서 그에게 유산을 분배 해 주었습니다. 12절에 보면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율법을 따라서 장자에게는 2/3를, 둘째에게는 1/3를 각각 나누워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이 방법이 둘째 아들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오늘 본문에서는 아버지가 왜 유산을 나누어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유산을 분배 받은 둘째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13-14절을 보면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고 했습니다. 유산을 분배 받은 둘째 아들은 며칠이 못되어 재산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낭비하여 버렸습니다. 여기서 유산을 분배 받은 둘째 아들이 며칠이 못되어 재산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로 갔다는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떠했는가를 말해 줍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13절의 ‘재산’은 원문으로 보면 ‘비오스’(bivo")가 아니라 ‘우시아’(oujsiva)입니다. 그러므로 유산을 분배 받은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의 연결고리를 단절하고 즐길 수 있는 현금을 확보했다는 말입니다. 둘째 아들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현금으로 바꾼 후에 먼 나라로 가서 거기서 아버지의 간섭 없이 허랑방탕하게 생활했습니다. 그 결과 얼마 안가서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궁핍하였습니다. 그는 먼 타국에서 먹고 살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가 먹고 살기 위해 무엇을 하였습니까? 15-16절을 보면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고 했습니다.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다 허비해 버린 둘째 아들은 먹고 살기 위해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돼지를 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붙여 사니’라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콜라오’(kollavw)라는 말인데 이 말은 ‘고용’이 아니라 자신을 다른 사람과 결속시키는 것 곧 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라는 말은 그 나라 사람처럼 살았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렵혀졌을 뿐만 아니라 제거되는 방식으로 곧 이방인처럼 살았다는 말입니다. 둘째 아들은 그 나라 시민이 되어 돼지농장에서 돼지치기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생활도 비참했습니다. 그는 너무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쥐엄 열매’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가 ‘케라티온’(keravtion)인데 이 말은 ‘작은 뿔’이라는 말로 구주콩나무(캐롭나무)를 가리킵니다. 이 나무에 열리는 10-25cm 정도의 크기의 콩은 돼지와 당나귀의 여물로 활용되었다고 합니다. 쥐엄 열매는 가난한 사람들이 식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으며, 랍비의 전승에 의하면 모진 가난의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했습니다(레 11:7; 신 14:8).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할례와 안식일 준수와 더불어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이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는 타락의 상징이었고, 유대인이 아무리 타락해도 돼지가 먹는 사료를 먹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고통은 ‘쥐엄 열매조차 주는 자가 없는지라’는 말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16).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주는 자가 없었다는 것은 그의 고통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철저히 탕진한 자이면서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철저히 탕진하고 잃어버린 자가 되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17절을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탄식했습니다. 여기서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은 ‘에이스 헤아우톤 데 엘돈’(eij" eJauto;n de ejlqw;n)이라는 말인데 ‘제 정신을 차린다’는 말입니다. 둘째 아들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비참한 신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아버지 집의 풍족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 둘째 아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했습니다. 18-19절을 보면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아버지에 대한 둘째 아들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12절에 보면 아버지를 떠날 때는 그냥 ‘아버지’라고만 말했지만 돌아올 때는 ‘내 아버지’라고 말합니다(18).

그런데 여기서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는 여전히 그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아들은 냉정하고 치욕스럽게 떠나면서 그의 공동체와 가족과 형과 아버지를 모욕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모욕은 사회적인 모욕 그 이상입니다. 아들의 모욕은 수평적인 측면뿐 아니라 수직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세계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은 창조질서 곧 하늘자체에 대한 모욕입니다(출 10:16). 곧 하나님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죄 용서 받기 위해서는 모욕을 당한 궁극적 대상에게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아들은 아들로서 완전히 망가졌으므로 아들이 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19절에 보면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고 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들로 영접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다만 종으로라도 고용되기를 기대할 뿐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버릇없이 불순종한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는 아들로서의 신분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종의 신분으로라도 아버지께 받아들여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오직 아버지의 긍휼을 구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드디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20절을 보면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거리가 먼데’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가 ‘마크란’(makravn)인데 이 단어는 13절의 ‘먼 나라’를 가리킬 때 사용된 것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마크란’이 반복되는 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즉 아버지는 그의 아들이 회개한 것을 알았을 때가 아니라 아들이 여전히 먼 나라에 있을 때 긍휼과 용서를 그곳까지 보냈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회개가 얻어낸 것이 아니라 아들이 한 마디를 내뱉기 이전에 대가 없이 그리고 아무 조건 없이 아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아들은 아버지가 그렇게 반응할 것인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불안은 20절에서 해소가 됩니다. 20절의 어휘는 비유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20절을 다시 보면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그림은 다른 성경 본문에는 단 한번 야곱과 에서의 화해 장면에 등장합니다(창 33장).

오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유산 문제로 아버지 뿐 아니라 형을 모욕했습니다. 이는 야곱이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같은 문제로 모욕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처럼 오늘 본문의 둘째 아들은 자신의 잘못을 자각합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야곱은 자신이 속였던 형 에서를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불명예를 안겼기 때문에 아버지를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오늘 본문의 둘째 아들의 두려움은 오해였습니다. 창세기 33:4절에 보면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도 보면 아버지는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멀리서도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에 21절에 보면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고 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18-19절에서 먼 나라에서 비참하게 되었을 때 한 고백을 다시 아버지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어떻게 합니까? 22-24절을 보면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2-24). 여기서 옷과 반지와 신발은 모두 지위와 명성과 명예를 상징합니다. 아버지의 이와 같은 지시는 돌아온 탕자를 아들로서 그 지위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아들로 복권시키는 일은 아버지의 권한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아들로 그 지위를 회복시켜 주심으로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아들은 품군의 하나로 돌아오고자 했으나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고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베풀어 환영하였습니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습니다. 이는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살진 송아지를 잡은 것은 진심어린 축하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 23절에서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라고 했을 때 ‘즐기자’라는 말이 헬라 원문으로 보면 ‘유프라이네인’(eujfranqw'men)인데 이 단어는 복음서 저자 중에 누가만 사용한 단어입니다. 누가는 이 단어를 통해서 기쁨의 주제를 전합니다. 누가는 비유 전체에서 이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합니다(23, 24, 29, 32). 둘째 아들이 반항하고 떠난 것은 그 자신에게나 아버지에게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것은 죽었던 아들이 살아난 것이며,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것과 같이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들을 향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앞에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날마다 돌아오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아버지의 아들로 온전히 회복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그 기쁨의 잔치에 참예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 25-26절을 보면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27절에 보면 이에 종이 대답하기를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고 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맏아들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28절에 보면 맏아들이 노하여 집에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였습니다. 형이 동생의 좋은 결과에 대한 아버지의 축하에 화를 낸 것은 단지 시기심 때문이 아닙니다. 이보다 심각한 이유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선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큰 아들은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여기며 동생처럼 스스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아버지가 나와서 권했습니다. 여기서 ‘권했다’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파레칼레이’(parekavlei)라는 말인데 이 말은 ‘초대하고 간청한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의 마음의 변화를 위해 계속해서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맏아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9-30절을 보면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고 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역공을 펼칩니다. 맏아들은 흠잡을 때 없이 성실하게 책임을 다했습니다. 오랜 세월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와 같은 자신에게 보상해 주지 않았으며 야박하고 불공정하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섬기고 고생하고 열심히 책임을 다한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친구들과 즐기게 한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동생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맏아들의 논지는 분명하고 강력합니다.

그러면 맏아들의 논지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1-32절을 보면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의 이유에 대해 거론하거나 반박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합니다. 맏아들은 여러 해 동안 충성되게 일한 자신에게 아버지가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맏아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부당한 고통을 겪는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맏아들의 이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애야’라고 부릅니다. ‘애야’라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테크논’(tevknon)이라는 말인데 문자적으로는 ‘아이’를 가리키지만 이 단어는 또한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는’ 암탉의 애정, 돌봄, 보호를 의미합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을 위해 결코 베푼적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대답은 맏아들에 대한 가장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방식의 표현입니다.

오늘 본문 32절에 보면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비유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오늘 비유를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합니다. 이 탕자 비유의 결말은 열려 있습니다. 맏아들의 운명은 해결되지 않은 채 비유가 마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이 바리새인들을 상징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맏아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맏아들은 ‘의’는 자신의 훌륭한 순종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배워야 합니다. ‘의’는 아버지의 사랑에 의해 얻어지는 선물이며, 연회에 참석함으로써 받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의’는 율법을 순종한 결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빌 3:9).

오늘 우리는 이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누가 과연 잃어버린 자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정말 탕자는 작은 아들이 아니라 맏아들입니다. 맏아들은 자신은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의롭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잃어버린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아버지의 법을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는 의로운 자이기에 마땅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바로 당시의 바리새인들이요,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이 잃어버린 자입니다. 사실 아담의 범죄 이후에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의로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셔서 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6:37-40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이켜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돌이켜 주셔서 돌아온 자들은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난 자임을 압니다. 잃어버렸다가 찾아진 자임을 압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돌아오게 된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의 모임은 잔치입니다. 교회란 이런 자들의 모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자기의 잘남을 자랑할 수가 없는 곳입니다. 오히려 자기의 못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갈 6:14). 만약 자기를 자랑할 것이 있다면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고후 12:9-10). 이처럼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모임,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모임, 이런 모임이 교회요, 천국의 잔치를 미리 맛본 자들의 모임입니다. 이런 자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이런 은혜를 맛보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자랑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와 우리교회를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아버지의 긍휼과 사랑이 온전히 드러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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