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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교수이신 이승구 교수님의 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직장생활에 대한 올바른 관을 갖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 하나님 영광의 증시를 위한 직업 ]
이승구 (국제 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노동과 직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의 직업 이해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의 직업 이해와 과연 어떻게 다를까?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떤 직업을 선호하여 선택하고, 일단 직업을 선택한 후에는 어떤 태도로 그 직업을 수행해야 할까? 직업이나 노동 문제에서는 신앙과 그리스도인 됨이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그리스도인의 직업관과 비그리스도인의 직업관의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운 현실에 많이 직면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현대 산업 사회 속에서는 좋은 직업으로 대개 (1) 그 직업을 통해서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고, (2) 그 직업이 자기 발전의 기회와 수단이 될 수 있고, (3) 그 직업 활동을 하면서도 여가를 어느 정도, 또는 상당히 많이 얻을 수 있으며, (4) 다른 이들이 낮추어 보지 않고, 그 직업에 대해서 존중을 표하게 되는 직업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들로 열거된다. 이는 대개 현대를 사는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좋은 직업의 상당히 세속적인 기준이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들의 직업에 대한 의식에서도 실질적으로 다른 것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때가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직업관이 비그리스도인과 전혀 차별이 없는 이런 현실은 과연 옳고 바른 것인가? 또한 우리의 직업 활동 수행의 구체적인 방식이 비그리스도인의 활동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과연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직업 선택이나 직업 활동의 수행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문제 의식이 이 논의의 근본적인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강의에서 (1) 문화 명령과 (2) 대위임령, 그리고 (3)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직업 이해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나는 우리의 직업과 노동은 성경이 말하는 그 이상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따라서 우리는 직업 선택과 수행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증시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활동해야만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1. 문화 명령의 빛에서 본 직업
개혁 신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창세기 1:28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blessing)이며, 동시에 인간에게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규정해 주시는 명령이라는 뜻에서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으로 이해해 왔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아이들을 낳고[生育], 그래서 많아지고[蕃盛], 그리하여 이 땅 위에 널리 퍼져 나가는[充滿] 목적은 이 땅을 정복하고 돌아보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하려는 데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하나님께서 친히 왕이 되시는 세상에 우리네 인간을 대리 통치자(vice-regent)로 세우신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형상을 따라 아주 고귀하게 창조하셨다. 통치권 그 자체가 형상인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치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 나가는 일이 우리들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그리고 이 땅을 다스리는 이 일은 결국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계에 우리네 인간의 힘을 가해서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개혁파 선배들은 이를 문화 명령이라고 불러 왔다. 이 문화 명령을 후크마 교수는 "하나님을 위해서 땅을 통치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문화를 개발시키라는 명령"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개혁파 선배들은 이 땅 위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다스림을 수행해 나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문화를 세상에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여 이 땅 위에 세우신 목적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 세상을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한 사람의 인간이 수행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다. 아담 혼자서 이 일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화 명령의 수행을 위해서 그에게 상응하는 돕는 배필로서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함께 이 명령을 수행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그 둘 만이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기원하여 존재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사명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화 명령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은사에 따라서 분담하여 함께 수행하도록 된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문화 명령의 빛에서 보면 사람은 자기의 은사와 능력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쫓아 이 땅 위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데 힘써야만 한다. 여기에 창조와 문화 명령의 빛에서 본 우리의 노동과 직업의 의미가 있다. 우리의 노동과 그것의 구체화된 형태인 직업은 하나님의 이 문화 명령을 이루기 위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는 인간이 이 문화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므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일부로 이 세상에 가시와 엉겅퀴가 나타나(창 3:18),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노동이 고되고 힘든 일이 되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니라 ...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창 3:17-19). 그리하여 인간은 이 세상에서 힘든 노동을 하다가 이 땅에로 돌아가도록 되었다: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창 3:19). 이제 노동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을 발전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드러내는 일일뿐만 아니라, 저주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그래도 이 땅 위에서 문화가 진전하도록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 이후에도 우리의 노동은, 저주로서 괴롭고 슬픈 것일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만 한다. 더구나, 우리가 다음 두 번째와 세 번째 요점에 대한 생각에서 고찰할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노동도 원칙적으로 구속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아직 타락의 영향력이 우리의 노동에도 미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노동의 구속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그리스도인들의 노동과 직업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우리에게 복 주시며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문화'를 이 땅 위에 가득하게 하는 일인 것이다. 문화 명령의 빛에서 보면 우리의 직업과 직업 활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 위에 증시(證示)하는 문화를 이루기 위한 활동이다.
2. 대위임령의 빛에서 본 직업
신약에는 또 하나의 명령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이다. 마태복음 28: 19-20절에서는 이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한국 교회 안에서 흔히 선교와 양육을 위한 말씀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이 말씀이 전도와 선교, 그리고 그 후에 양육과 기독교 교육을 명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 하면 이 말씀은 (1) 모든 족속들에게로 가서 (2)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3) 예수님을 믿어 제자가 된 이들에게 성부의, 성자의,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4) 세례 받은 자들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나타난 4 가지 동사 가운데서 주 동사는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이고, 나머지 3 개의 동사는 이 주 동사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족속에게로 나아가는 일은 결국 그들에게 복음을 제시해서 제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고, 세례 주는 일은 제자가 되었음을 드러내는 일이고, 가르치는 일도 제자 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위임령의 뜻을 그저 좁은 의미의 전도와 선교, 양육 등으로 다 말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말씀은 결국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라는 뜻이고, 제자가 된 이들에게 예수님의 뜻을 다 가르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다른 이들을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 전도에 힘쓰는 이인가? 그것도 제자 됨의 한 부분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제자 됨의 의미를 다 소진(消盡)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든 것을 다 수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든 것에는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일만이 속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 명령과 대위임령의 관계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예수님의 대위임령을 다 수행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네 인간들이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문화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문화 명령의 수행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진정한 의미의 제자 됨을 온전히 다 실현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제자는 그저 성경 읽고 기도하고 전도에 힘쓰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에 힘쓰면서 또한 주어진 직업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서 힘쓰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직업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이는 진정한 의미의 제자 됨을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대위임령의 빛에서 보았을 때도 우리의 직업도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귀한 작업의 한 부분이다.
우리의 직업에 대해서 이런 성경적 의미를 제대로 밝히고 드러낸 이들은 개혁자들(reformers)이었다고 할 수 있다. 루터로 말미암아 소명이라는 뜻의 Beruf 라는 단어가 독일어에서 일상적인 직업을 지칭하는 말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얼마나 상식적인 말이 되어 버렸는가? 이전에는 세속적인 일이라고 하던 것이 개혁자들 덕분에 이제 더 이상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소명이라고 의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개혁자들의 소명으로서의 직업 개념을 주님의 지상 명령과 연관시켜야 한다. 그래야 소명으로서의 직업의 그 진정한 의미를 다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본 직업
이와 연관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天國]와 우리 직업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天國]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왔으며, 그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 즉 천국(天國)에 속해 있는 천국 백성이다. 그리스도인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중생하는 그 순간부터 이 땅에서도 이미 천국에 속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으로 인하여 이미 이 땅에로 임하여 와서, 이 땅의 역사 가운데서 진행하며 성장하여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 나라 이해의 빛에서 보면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 나라 백성[天國百姓]으로서의 삶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일에는 종교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활동이 포함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우리의 직업 활동도 진정하고 실재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 따라서 우리의 직업과 그와 관련된 활동은 그저 우리가 돈을 벌거나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잘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활동이 된다. 우리의 직업 활동이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일인 것이다.
직업을 이와 같이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런 뜻 없이 자신의 직업 활동에 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직업 활동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면 무성의하게 그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근거해서 그 일을 하려고 해야만 한다. 그런 태도로 직업에 임하는 이들은 주어진 일을 건성으로 하거나, 사람만을 위해서 일하지 않을 것이다.
4. 구체적인 예 하나
이제 이런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직업 활동의 구체적인 예를 신약 성경으로부터 들어보기로 하자. 이제까지의 논의를 보면서, 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이며 어떤 좋은 직업들과 관련해서만 그런 것을 말할 수 있지, 우리의 구체적인 직업 속에서 과연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 이들을 위해서, 신약 성경에 나타난 직업 가운데서 가장 천한 직업을 하나 생각해 보자. 그것도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노예'가 그것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노예의 일을 보면서, 그것은 문화 명령이나, 대위임령이나 하나님 나라나, 하나님의 영광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할 이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사도가 노예들(종들)에게 주고 있는 권면에 의하면 우리의 이런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서, 에베소서 6:5-8을 보라.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 앎이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종들이 하는 일은 사실상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종들이다. (특정한 사람들만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생각하는 것에 반하여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그리스도의 종이요, 하나님의 종이다! 심지어 고대 사회의 노예들도 기독교적 의미에서는 다른 주인들의 노예[종]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섬김으로 일을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일에 임해서는 안되며, 참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일을 감당해야 한다.
고대 사회의 노예의 상황을 안다면 그들에게 대해서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반응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이런 바울의 권면을 기득권자로서 현상 유지(status quo)를 위한 권면이라고 반응하는 이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반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의 답답하고 숨막힐 것 같은 직업의 상황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는 권면이다.
이런 권면의 근거는 무엇일까? 우리의 바른 정신과 마음에 근거한 직업 활동은, 그것이 여기 제시된 이런 정신과 태도로 수행되기만 한다면, 그것이 문화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수행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잃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숨막힐 것 같은 직업 현장 가운데서도 이런 태도로 우리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바울은 이런 태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런 식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이들에게 친히 갚아 주신다는 incentive도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이런 보상을 생각하고 다른 이들을 섬기라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 이 말씀을 이해하면 바울이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의도가 다 상실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에 주께서 보상해 주신다는 것 때문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의미에 근거해서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할 것이고, 그런 힘씀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도 정상적으로 제대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5. 마치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창조 후에 인간들에게 주신 문화 명령과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우리에게 주신 대위임령과 ,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으로 세우신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직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그 구체적인 예로 1 세기 때의 노예들이 과연 어떻게 직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사도적 교훈이 권면이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모든 논의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은 직업을 어떻게, 어떤 태도로 선택하고, 그 활동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 이 논의에 근거한 몇 가지 제안을 해 보기로 하자.
1.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한 태도로 직업을 선택하고 수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직업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2. 그리스도인은 될 수 있는 대로 다른 이들을 많이 도울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고, 다른 이들을 돕는 태도로 직업 활동을 수행해야만 한다.
3. 그리스도인은 될 수 있는 대로 피조계 전체를 돌아 볼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고, 피조계를 돌아보는 태도로 직업 활동을 수행해야만 한다.
4.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피조계 전체를 돌아보면서 자아의 진정한 의미와 자아의 실현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직업 활동은 이렇게 제대로 이해된 자아 실현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직업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이 피조계를 돌아봄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잘 드러내며, 하나님의 영광을 증시해야만 한다.
이 수행 과정 가운데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으로 주어진 나의 진정한 나됨이 나타나고 실현된다".
이제 남은 문제는 우리가 과연 이런 생각을 실존적으로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실천이 없이는 우리는 우리의 직업에 대한 선택과 활동에 있어서 비그리스도인과 차이가 없을 것이고. 진정한 의미의 신앙을 우리의 직업 선택과 직업 활동에는 적용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우리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직업 문제에 있어서도 어떻게 하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가(how to become a genuine Christian) 하는 것이다.
[ 하나님 영광의 증시를 위한 직업 ]
이승구 (국제 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노동과 직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의 직업 이해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의 직업 이해와 과연 어떻게 다를까?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떤 직업을 선호하여 선택하고, 일단 직업을 선택한 후에는 어떤 태도로 그 직업을 수행해야 할까? 직업이나 노동 문제에서는 신앙과 그리스도인 됨이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그리스도인의 직업관과 비그리스도인의 직업관의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운 현실에 많이 직면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현대 산업 사회 속에서는 좋은 직업으로 대개 (1) 그 직업을 통해서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고, (2) 그 직업이 자기 발전의 기회와 수단이 될 수 있고, (3) 그 직업 활동을 하면서도 여가를 어느 정도, 또는 상당히 많이 얻을 수 있으며, (4) 다른 이들이 낮추어 보지 않고, 그 직업에 대해서 존중을 표하게 되는 직업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들로 열거된다. 이는 대개 현대를 사는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좋은 직업의 상당히 세속적인 기준이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들의 직업에 대한 의식에서도 실질적으로 다른 것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때가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직업관이 비그리스도인과 전혀 차별이 없는 이런 현실은 과연 옳고 바른 것인가? 또한 우리의 직업 활동 수행의 구체적인 방식이 비그리스도인의 활동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과연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직업 선택이나 직업 활동의 수행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문제 의식이 이 논의의 근본적인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강의에서 (1) 문화 명령과 (2) 대위임령, 그리고 (3)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직업 이해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나는 우리의 직업과 노동은 성경이 말하는 그 이상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따라서 우리는 직업 선택과 수행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증시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활동해야만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1. 문화 명령의 빛에서 본 직업
개혁 신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창세기 1:28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blessing)이며, 동시에 인간에게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규정해 주시는 명령이라는 뜻에서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으로 이해해 왔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아이들을 낳고[生育], 그래서 많아지고[蕃盛], 그리하여 이 땅 위에 널리 퍼져 나가는[充滿] 목적은 이 땅을 정복하고 돌아보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하려는 데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하나님께서 친히 왕이 되시는 세상에 우리네 인간을 대리 통치자(vice-regent)로 세우신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형상을 따라 아주 고귀하게 창조하셨다. 통치권 그 자체가 형상인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치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 나가는 일이 우리들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그리고 이 땅을 다스리는 이 일은 결국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계에 우리네 인간의 힘을 가해서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개혁파 선배들은 이를 문화 명령이라고 불러 왔다. 이 문화 명령을 후크마 교수는 "하나님을 위해서 땅을 통치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문화를 개발시키라는 명령"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개혁파 선배들은 이 땅 위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다스림을 수행해 나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문화를 세상에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여 이 땅 위에 세우신 목적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 세상을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한 사람의 인간이 수행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다. 아담 혼자서 이 일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화 명령의 수행을 위해서 그에게 상응하는 돕는 배필로서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함께 이 명령을 수행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그 둘 만이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기원하여 존재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사명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화 명령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은사에 따라서 분담하여 함께 수행하도록 된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문화 명령의 빛에서 보면 사람은 자기의 은사와 능력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쫓아 이 땅 위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데 힘써야만 한다. 여기에 창조와 문화 명령의 빛에서 본 우리의 노동과 직업의 의미가 있다. 우리의 노동과 그것의 구체화된 형태인 직업은 하나님의 이 문화 명령을 이루기 위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는 인간이 이 문화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므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일부로 이 세상에 가시와 엉겅퀴가 나타나(창 3:18),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노동이 고되고 힘든 일이 되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니라 ...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창 3:17-19). 그리하여 인간은 이 세상에서 힘든 노동을 하다가 이 땅에로 돌아가도록 되었다: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창 3:19). 이제 노동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을 발전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드러내는 일일뿐만 아니라, 저주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그래도 이 땅 위에서 문화가 진전하도록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 이후에도 우리의 노동은, 저주로서 괴롭고 슬픈 것일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만 한다. 더구나, 우리가 다음 두 번째와 세 번째 요점에 대한 생각에서 고찰할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노동도 원칙적으로 구속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아직 타락의 영향력이 우리의 노동에도 미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노동의 구속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그리스도인들의 노동과 직업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우리에게 복 주시며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문화'를 이 땅 위에 가득하게 하는 일인 것이다. 문화 명령의 빛에서 보면 우리의 직업과 직업 활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 위에 증시(證示)하는 문화를 이루기 위한 활동이다.
2. 대위임령의 빛에서 본 직업
신약에는 또 하나의 명령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이다. 마태복음 28: 19-20절에서는 이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한국 교회 안에서 흔히 선교와 양육을 위한 말씀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이 말씀이 전도와 선교, 그리고 그 후에 양육과 기독교 교육을 명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 하면 이 말씀은 (1) 모든 족속들에게로 가서 (2)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3) 예수님을 믿어 제자가 된 이들에게 성부의, 성자의,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4) 세례 받은 자들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나타난 4 가지 동사 가운데서 주 동사는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이고, 나머지 3 개의 동사는 이 주 동사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족속에게로 나아가는 일은 결국 그들에게 복음을 제시해서 제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고, 세례 주는 일은 제자가 되었음을 드러내는 일이고, 가르치는 일도 제자 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위임령의 뜻을 그저 좁은 의미의 전도와 선교, 양육 등으로 다 말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말씀은 결국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라는 뜻이고, 제자가 된 이들에게 예수님의 뜻을 다 가르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다른 이들을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 전도에 힘쓰는 이인가? 그것도 제자 됨의 한 부분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제자 됨의 의미를 다 소진(消盡)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든 것을 다 수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든 것에는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일만이 속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 명령과 대위임령의 관계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예수님의 대위임령을 다 수행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네 인간들이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문화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문화 명령의 수행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진정한 의미의 제자 됨을 온전히 다 실현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제자는 그저 성경 읽고 기도하고 전도에 힘쓰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에 힘쓰면서 또한 주어진 직업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서 힘쓰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직업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이는 진정한 의미의 제자 됨을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대위임령의 빛에서 보았을 때도 우리의 직업도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귀한 작업의 한 부분이다.
우리의 직업에 대해서 이런 성경적 의미를 제대로 밝히고 드러낸 이들은 개혁자들(reformers)이었다고 할 수 있다. 루터로 말미암아 소명이라는 뜻의 Beruf 라는 단어가 독일어에서 일상적인 직업을 지칭하는 말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얼마나 상식적인 말이 되어 버렸는가? 이전에는 세속적인 일이라고 하던 것이 개혁자들 덕분에 이제 더 이상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소명이라고 의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개혁자들의 소명으로서의 직업 개념을 주님의 지상 명령과 연관시켜야 한다. 그래야 소명으로서의 직업의 그 진정한 의미를 다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본 직업
이와 연관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天國]와 우리 직업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天國]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왔으며, 그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 즉 천국(天國)에 속해 있는 천국 백성이다. 그리스도인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중생하는 그 순간부터 이 땅에서도 이미 천국에 속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으로 인하여 이미 이 땅에로 임하여 와서, 이 땅의 역사 가운데서 진행하며 성장하여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 나라 이해의 빛에서 보면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 나라 백성[天國百姓]으로서의 삶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일에는 종교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활동이 포함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우리의 직업 활동도 진정하고 실재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 따라서 우리의 직업과 그와 관련된 활동은 그저 우리가 돈을 벌거나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잘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활동이 된다. 우리의 직업 활동이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일인 것이다.
직업을 이와 같이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런 뜻 없이 자신의 직업 활동에 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직업 활동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면 무성의하게 그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근거해서 그 일을 하려고 해야만 한다. 그런 태도로 직업에 임하는 이들은 주어진 일을 건성으로 하거나, 사람만을 위해서 일하지 않을 것이다.
4. 구체적인 예 하나
이제 이런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직업 활동의 구체적인 예를 신약 성경으로부터 들어보기로 하자. 이제까지의 논의를 보면서, 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이며 어떤 좋은 직업들과 관련해서만 그런 것을 말할 수 있지, 우리의 구체적인 직업 속에서 과연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 이들을 위해서, 신약 성경에 나타난 직업 가운데서 가장 천한 직업을 하나 생각해 보자. 그것도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노예'가 그것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노예의 일을 보면서, 그것은 문화 명령이나, 대위임령이나 하나님 나라나, 하나님의 영광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할 이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사도가 노예들(종들)에게 주고 있는 권면에 의하면 우리의 이런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서, 에베소서 6:5-8을 보라.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 앎이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종들이 하는 일은 사실상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종들이다. (특정한 사람들만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생각하는 것에 반하여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그리스도의 종이요, 하나님의 종이다! 심지어 고대 사회의 노예들도 기독교적 의미에서는 다른 주인들의 노예[종]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섬김으로 일을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일에 임해서는 안되며, 참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일을 감당해야 한다.
고대 사회의 노예의 상황을 안다면 그들에게 대해서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반응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이런 바울의 권면을 기득권자로서 현상 유지(status quo)를 위한 권면이라고 반응하는 이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반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의 답답하고 숨막힐 것 같은 직업의 상황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는 권면이다.
이런 권면의 근거는 무엇일까? 우리의 바른 정신과 마음에 근거한 직업 활동은, 그것이 여기 제시된 이런 정신과 태도로 수행되기만 한다면, 그것이 문화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수행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잃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숨막힐 것 같은 직업 현장 가운데서도 이런 태도로 우리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바울은 이런 태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런 식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이들에게 친히 갚아 주신다는 incentive도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이런 보상을 생각하고 다른 이들을 섬기라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 이 말씀을 이해하면 바울이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의도가 다 상실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에 주께서 보상해 주신다는 것 때문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의미에 근거해서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할 것이고, 그런 힘씀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도 정상적으로 제대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5. 마치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창조 후에 인간들에게 주신 문화 명령과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우리에게 주신 대위임령과 ,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으로 세우신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직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그 구체적인 예로 1 세기 때의 노예들이 과연 어떻게 직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사도적 교훈이 권면이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모든 논의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은 직업을 어떻게, 어떤 태도로 선택하고, 그 활동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 이 논의에 근거한 몇 가지 제안을 해 보기로 하자.
1.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한 태도로 직업을 선택하고 수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직업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2. 그리스도인은 될 수 있는 대로 다른 이들을 많이 도울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고, 다른 이들을 돕는 태도로 직업 활동을 수행해야만 한다.
3. 그리스도인은 될 수 있는 대로 피조계 전체를 돌아 볼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고, 피조계를 돌아보는 태도로 직업 활동을 수행해야만 한다.
4.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피조계 전체를 돌아보면서 자아의 진정한 의미와 자아의 실현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직업 활동은 이렇게 제대로 이해된 자아 실현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직업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이 피조계를 돌아봄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잘 드러내며, 하나님의 영광을 증시해야만 한다.
이 수행 과정 가운데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으로 주어진 나의 진정한 나됨이 나타나고 실현된다".
이제 남은 문제는 우리가 과연 이런 생각을 실존적으로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실천이 없이는 우리는 우리의 직업에 대한 선택과 활동에 있어서 비그리스도인과 차이가 없을 것이고. 진정한 의미의 신앙을 우리의 직업 선택과 직업 활동에는 적용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우리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직업 문제에 있어서도 어떻게 하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가(how to become a genuine Christian)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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