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제 목 : “현대교회와 교리 설교의 회복”
이승구교수
들어가는 말: 교리 설교의 회복을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의식하고 있듯이 오늘날에는 교리가 교회 안에서 점점 더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아주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성도들이 자신들이 믿는 바의 내용을 모르면서 교회에 속해 있다. 중세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그리했던 바와 같이 오늘날은 일부 천주교인뿐만 아니라 많은 개신교도들도 자신들이 믿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중세 말기에 많은 천주교도들이 자신이 믿는 바의 내용을 몰라도 그저 교회에 속해 있으면 교회 안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며 믿었던 것과 같이, 오늘날 많은 개신교인들도 그저 교회 안에 속해 있으면 자신들은 구원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를 성도들의 우민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우민화를 결국 교회가 그 믿고 고백하는 바의 내용을 잘 가르치지 않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는 교단이라는 것이 점차 그 의미를 상실하여 가고 있다. 교단을 불문하고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설교되는 바가 비슷하여 과연 이 교회가 장로교회인지, 감리교회인지, 성결교회인지 등등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일이 많다. 상당히 많은 교회들의 모습이 다 비슷해져 가고 있다. 일부 목회자들은 매우 의식적으로 이런 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그 교회 명칭에 교단을 짐작하게 하는 바를 제거하기도 하고, 그 가르치는 바나 그 예배의 모습에 있어서 여러 교회들이 점차 통일 되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이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며, 즉 각각의 교단이 성경이 말하는 바를 다 같이 지향하여 성경적 가르침으로 통일 되고 있다면 우리는 이런 현상을 환영할 것이고 이런 일을 더 일반화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보다는 모든 성도들이 이전 시대의 교회와 같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의식적으로 잘 배워 가려고 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교회를 바로 세우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런 일은 아주 심각한 문제라는 것에 더 공감하면서 이 글에서는 왜 교리를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1. 교리와 그 성립, 그리고 교리 설교
먼저 일단은 각 교파 의식을 갖지 말고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이 모두 같이 고백하는 신앙 고백인 사도신경이나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등의 보편적인 신조들과 그 내용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을 중심으로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은 교리 설교는 교파 의식을 조장하는 것이라는 오해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리 설교는 보편적 신조들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는 우리가 이단이 아닌 정통적인 교회라면 어느 교회나 믿고 고백해야 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에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교회나 설교자들은 결국 이단으로 나아가는 일을 준비하는 것이 된다. 이단이 아닌 이상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사도신경이나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 등의 내용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흥미롭게도 그 내용으로는 더 늦게 나타난 니케아 신조가 가장 보편적인 신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명확하게는 니케아 신조(324)와 콘스탄티노플 신조(381)를 나누어 생각하지만, 일반적으로 콘스탄티노플 신조까지를 포함하여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생각하는 일이 많이 있다. 좁은 의미의 니케아 신조는 아리우스의 견해가 옳지 않음을 명확히 하며 성부와 성자의 동일 본질(homoousios)을 선언하는 신조로 좀더 짧고 “그리고 성령을 믿사옵나이다”로 고백문이 그쳐진 후에 아리우스주의에 대한 네 가지 저주 선언으로 마쳐지고 있다. 이는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의 세례 고백문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모두에서 성찬 예배 때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또는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1) 그리스도에 대해 고백하는 두 번째 부분이 좀더 길고, (2) 동일 본질(homoousios)을 설명하기 위해 니케아 신조에서 덧붙이고 있는 “성부의 본질로부터”(ἐκ τῇς οὐσίας τοὖ πατρός)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고, (3) 성령의 지위와 사역에 대한 긴 진술을 지닌 셋째 부분이 있고, (4) 그 후에 교회와, 세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에 대한 주장이 뒤따라 나오고 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언급되는 이 신조의 내용은 칼시돈 공의회(451년)에서는 381년에 있었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졌지만 초기 권위자들은 콘스탄티노플 신조라 할 때의 의미를 449-50년에 개최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 연관시켜 이해한다. 성찬 예배 중에 복음서를 읽은 후에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고백하는 일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안디옥에서 Peter the Fuller (476-88 재위) 아래서 되어진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1,014년에 서방 교회가 이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이전에도 이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에서 번져 나갔다.
그리고 서방 교회에서는 제3차 톨레도 공의회(589)에서 성령에 대해 고백하는 중 “그리고 아들로부터도”(filioque)라는 문구가 덧붙여져서 서방 교회에서는 이 “아들로부터도”(filioque)를 함께 고백하는 일이 일반화 되었다. 서방 교회에서는 주일과 큰 축일들에만 이 신조를 사용하였다가고 한다. 동방교회에서는 이 “아들로부터도”(filioque)라는 어귀를 제외한 본래의 형태를 지닌 신조가 세례 신앙고백문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사실 이 보다 좀더 단순한 형태의 사도신경은 주로 서방교회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후에는 동방교회도 (비록 예배식이나 공식적 행사에서 사용하는 일은 없어도) 그 내용을 받아 들였다. 약 250년경의 로마 교회의 세례 고백문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도 신경이라는 표제 자체는 390년에 암브로시우스의 서신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고, 이런 옛 로마 신앙고백문을 더 확대한 지금의 형태는 8세기 초반 St. Pirminius에 의해서 처음 인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신앙 고백은 250년 이후로 교회에서 계속 믿어지고 고백되어 온 것이다.
우리들도 이 교회와의 연관성을 지닌 공교회에 속해 있는 교회임을 생각하면서 같은 신앙 고백을 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가 이단이 아닌 진정한 교회라면 역사상의 정통파 교회와 같은 신앙 고백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신앙 고백을 그 내용에 대한 이해 없이 고백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리고 그 내용을 가르치지 않고서 성도들이 그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처음 교회나 역사적인 교회는 정신을 차리고 바로 할 때에는 항상 사도신경이 언급하는 내용을 가르쳐 왔고, 대개는 그것을 설교 시간을 사용하여 가르쳤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 내용을 교회에서 설교와 여러 방법을 사용해서 가르쳐서 고대 교회와 함께 같은 신앙의 내용을 고백해야만 한다. 더구나 종교 개혁 교회는 중세 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고백하는 내용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바를 개혁하기 위해서 믿는바 내용을 성경에 근거하여 열심히 가르쳤다. 그래서 개신교도들은 자신이 고백하는 바를 아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였던 것을 명심하면서 오늘날의 개신교회도 그 믿는 바를 가르치는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2. 교리 설교와 그 의미
그러므로 교리를 가르치는 설교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 함께 신앙 고백하는 일의 중요성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과거의 공교회와 함께 성경에서 가르친 사도적 가르침을 그대로 고백하는 교회임을 드러내면서 함께 고백하는 것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사도적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고, 교리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같이 고백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사도들이 가르친 가르침의 내용을 성경에 근거해서 정확히 이해해 보려고 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우리의 믿고 있는 바를 바르게 고백하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고대 교회가 고백한 바를 바로 이해하고 그와 함께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2) 교회 교육의 방법으로서의 교리 설교
이와 함께 교리 설교는 다음 세대의 교회도 같은 고백을 하면서 같이 나아가기 위해 교회를 교육하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 세대가 제대로 신앙 고백하는 것으로 교회가 든든히 서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교회는 계대적(繼代的)으로 신앙을 지켜 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리 설교는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교육의 의미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밀접히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일단 함께 고백을 하는 과정이 의미 있으려면 교리(즉 우리들이 성경에 근거해서 믿는 바를) 잘 가르쳐야 하고, 같이 그 내용을 가르쳐야 모두가 제대로 고백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교리 설교의 방법
그런데 교리를 가르치는 설교에 대해서 많은 오해들이 있다. 그리고 그 오해 때문에 우리들은 교리를 가르치는 교리 설교를 하지 않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이 많다. 교리 설교에 대한 오해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를 가르치지 말고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탈 교리적인 성경적 설교를 해야 한다. (2) 교리 설교는 제목 설교와 같이 서로 연관성을 지니지 못한다, (3) 교리 설교는 딱딱하고, 너무 길어서 지루하다. 그리고 교리 설교는 재미가 없다. (4) 그러므로 교리 설교는 교회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다 오해인 것이다. 물론 교리 설교를 잘 하지 못하면 이것이 오해가 아니라 교리 설교의 현실을 드러내 주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교리 설교를 잘 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바른 교리 설교는 이런 오해를 극복하는 설교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1) “한번에 한 주제씩 성경을 강해하는 설교” 계획
먼저 교리 설교를 하려면 먼저 설교자가 명확한 계획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교리에 대한 설교는 교리적 진술을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믿는 바가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련의 교리 설교는 그 하나하나로 보면 성경을 강해하는 강해 설교가 될 수 있다. 강해 설교를 하는 하나의 방식은 본문을 연속해서 강해해 가면서 그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잘 드러내어 주는 방법이다. 그러나 또 다른 강해의 방법으로는 설교자가 성경의 본문을 익숙히 알고 있는 것에 근거해서 일정한 교리의 내용이 근거하고 있는 성경 본문을 잘 강해하는 식의 강해를 언급할 수 있다. 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설교자에게 교리 자체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성경 본문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만 한다. 교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그 교리가 과연 어떤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를 모르게 된다. 그렇게 알고 있는 교리는 우리가 그 성경적 근거를 분명히 하기 전까지는 무익한 것이 된다. 그런 식의 가르침에 계속되면 교리 설교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하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각각의 교리의 성경적 근거를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 교리를 설교할 때에는 그 근거가 되는 성경을 폭 넓은 관점에서 잘 주해한 것에 근거하여 그 안에 내포된 교리를 이끌어 내는 일을 해야 한다.
이 일을 제대로 행하면 그 결과로 성도들이 성경 본문을 잘 이해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교리라는 것이 그저 교회가 교조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해서 성경적 사상을 가지고 고백하는 것임을 잘 이해하게 된다. 이런 방식의 교리 설교는 그 자체만으로는 주어진 본문을 잘 강해하는 강해 설교가 되고, 그것의 교의적 내용을 도출해 내는 매우 교리적인 설교가 되며,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를 이끌어 내는 매우 실천적인 설교가 된다. 그러므로 그 한편의 설교가 연속적 강해의 한 부분이 될 때는 그 성경책에 대한 강해에 속해 있을 때나 별반 다름이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일반적 의미의 강해 설교에서도 그 본문에 담긴 교리의 의미를 드러내는 작업도 해야 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의도하는 바를 분명히 하는 일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좋은 교리 설교는 성경에 대한 바른 강해에서 나오는 것이며, 성경적인 설교가 된다. 다시 강조하자면, 좋은 교리 설교는 성경적 설교이고, 나쁜 교리 설교는 성경적이지 않은 설교이다. 또한 역으로, 성경적 교리를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 설교는 좋은 기독교 설교가 아니며, 좋은 기독교 설교는 성경의 교리적 내용을 바르게 이끌어 내어 그것이 성도의 사상이 되도록 하며, 그것에 따라 살게 하는 설교이다.
(2) “연속적인 설교” 계획
그러므로 좋은 교리 설교는 한번에 하는 설교가 될 수 없고, 연속적인 설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일련의 설교를 계획하고 수행할 때에 교리 설교의 진정한 의미가 잘 살아 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주일 아침 설교는 주어진 책들을 연속적으로 강해하는 강해 설교를 한다면, 주일 저녁 예배나 오후 예배 설교는 교리의 내용을 연속적으로 강해하는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식은 사도 신경의 내용을 몇 주에 걸쳐서 찬찬히 설명해 가는 것이다. 한 조항 한 조항의 고백이 과연 어떻게 성경적이고 어떤 성경적 근거를 지니고 있는 지를 드러내어 보이면 그것이 완성될 때 우리의 사도신경 고백이 진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지를 모든 교우들이 더 깊이 이해하는 터에서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과연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일련의 설교를 할 수도 있다. 한편 한편의 설교는 독립되어 있으면서 그 모든 설교가 연속해서 과연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잘 드러내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교리 설교는 항상 연속적인 기획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설교여야만 한다.
(3) “교리 설교의 다양성을 드러내는” 설교 계획
그리고 이런 설교를 할 때 우리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매번 설교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의 가르침의 깊은 의미를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매번 같은 방식으로만 설교하면 모든 이들이 설교가 진행되는 방향을 알기에 단조롭게 느끼며 교리 설교는 재미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교리 설교가 “지루하다, 딱딱하다, 재미없다”고 하는 것은 교리 설교 자체 때문에 나온 문제가 아니고, 설교를 하는 사람이 다양성 있게 제대로 설교 하지 못하여 생기는 오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한 방법을 매번 활동하여 우리가 가는 길을 잘 모르면서도 그 설교를 듣고 나면 성경적 교리가 마음에 새겨지고, 그런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살게끔 해야 하는 것이다.
(4)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교리 설교” 계획
이와 같이 진행되는 재미있고 다양성 있는 성경의 내용을 잘 알게 하고 그것이 함의하는 교리를 잘 이끌어 내는 설교는 결국 성도들을 건강하게 하고 이 땅에서 바른 사상을 가지고 살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교리 설교는 성도들, 즉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하는 것이다. 성경적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성경적 사상을 형성하게 되고, 성경적 삶을 향해 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4. 교리 설교의 한 예로써 요리문답 강해
이러한 교리 설교를 잘 했던 이전 시대의 교회의 좋은 예로 화란 개혁파 교회와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개혁파 교회에서 주일 오후나 저녁 시간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지속적으로 강해하던 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문답을 52주로 나누어 제시하던 때로부터 지속적으로 주일마다 오후나 저녁 시간에 이 내용을 가르치던 교회는 자신들이 고백하던 바를 명확히 알고, 그 성경적 근거를 분명히 하는 교회로 나타날 수 있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전통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일년에 이 내용에 대한 검토를 마치려 하지 말고 몇 년에 걸쳐서 그 내용을 강해하여 좀더 성경적 근거를 분명히 하는 방식으로 논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내용을 성경에 근거해서 강론하기만 한다면 교회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그 내용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 대한 강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가르치면 교리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음을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이다.
5. 결론: 한국에 건전한 교리 설교가 나타날 날을 기대하면서
이글을 마치면서 한국 교회에 진정하고도 매우 건전한 교리 설교가 나타나고 우리 사상을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날을 고대하게 된다. 물론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교자들이 성경 내용도 잘 알고 있어야 하고, 교리의 내용도 잘 알고 있어야 하며, 성경을 무리하게 끌어가지 않는 노력도 해야 하며, 생동감 있게 현실적인 적용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도들이 처한 정황도 잘 알아야 하고 성도들의 현실적인 문제와 그 때의 사고방식도 잘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그로부터 성경적인 방향으로 성도들의 사고방식과 사고 내용을 고쳐 가고 효과적으로 그런 내용의 변환을 이루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설교는 성경적이어야 하며, 성경에 근거한 교리에 충실한 것이어야 하고, 현실에 적합성을 지녀야 하고, 성도와 교회를 변혁시키는 능력도 지닌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것이 함께 있어야 좋은 설교인 것이다. 우리들이 교회의 설교는 모두 이런 설교일 수 있었으면 한다. 언제 어디서 설교를 듣던지, 성경의 내용을 바르게 알게 되고, 그것이 가르치려는 교리를 정확히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를 이끌어 나가는 바를 향해 강하게 나가도록 하는 설교이기를 바란다.
이승구교수
들어가는 말: 교리 설교의 회복을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의식하고 있듯이 오늘날에는 교리가 교회 안에서 점점 더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아주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성도들이 자신들이 믿는 바의 내용을 모르면서 교회에 속해 있다. 중세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그리했던 바와 같이 오늘날은 일부 천주교인뿐만 아니라 많은 개신교도들도 자신들이 믿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중세 말기에 많은 천주교도들이 자신이 믿는 바의 내용을 몰라도 그저 교회에 속해 있으면 교회 안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며 믿었던 것과 같이, 오늘날 많은 개신교인들도 그저 교회 안에 속해 있으면 자신들은 구원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를 성도들의 우민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우민화를 결국 교회가 그 믿고 고백하는 바의 내용을 잘 가르치지 않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는 교단이라는 것이 점차 그 의미를 상실하여 가고 있다. 교단을 불문하고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설교되는 바가 비슷하여 과연 이 교회가 장로교회인지, 감리교회인지, 성결교회인지 등등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일이 많다. 상당히 많은 교회들의 모습이 다 비슷해져 가고 있다. 일부 목회자들은 매우 의식적으로 이런 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그 교회 명칭에 교단을 짐작하게 하는 바를 제거하기도 하고, 그 가르치는 바나 그 예배의 모습에 있어서 여러 교회들이 점차 통일 되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이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며, 즉 각각의 교단이 성경이 말하는 바를 다 같이 지향하여 성경적 가르침으로 통일 되고 있다면 우리는 이런 현상을 환영할 것이고 이런 일을 더 일반화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보다는 모든 성도들이 이전 시대의 교회와 같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의식적으로 잘 배워 가려고 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교회를 바로 세우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런 일은 아주 심각한 문제라는 것에 더 공감하면서 이 글에서는 왜 교리를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1. 교리와 그 성립, 그리고 교리 설교
먼저 일단은 각 교파 의식을 갖지 말고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이 모두 같이 고백하는 신앙 고백인 사도신경이나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등의 보편적인 신조들과 그 내용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을 중심으로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은 교리 설교는 교파 의식을 조장하는 것이라는 오해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리 설교는 보편적 신조들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는 우리가 이단이 아닌 정통적인 교회라면 어느 교회나 믿고 고백해야 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에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교회나 설교자들은 결국 이단으로 나아가는 일을 준비하는 것이 된다. 이단이 아닌 이상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사도신경이나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 등의 내용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흥미롭게도 그 내용으로는 더 늦게 나타난 니케아 신조가 가장 보편적인 신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명확하게는 니케아 신조(324)와 콘스탄티노플 신조(381)를 나누어 생각하지만, 일반적으로 콘스탄티노플 신조까지를 포함하여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생각하는 일이 많이 있다. 좁은 의미의 니케아 신조는 아리우스의 견해가 옳지 않음을 명확히 하며 성부와 성자의 동일 본질(homoousios)을 선언하는 신조로 좀더 짧고 “그리고 성령을 믿사옵나이다”로 고백문이 그쳐진 후에 아리우스주의에 대한 네 가지 저주 선언으로 마쳐지고 있다. 이는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의 세례 고백문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모두에서 성찬 예배 때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또는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1) 그리스도에 대해 고백하는 두 번째 부분이 좀더 길고, (2) 동일 본질(homoousios)을 설명하기 위해 니케아 신조에서 덧붙이고 있는 “성부의 본질로부터”(ἐκ τῇς οὐσίας τοὖ πατρός)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고, (3) 성령의 지위와 사역에 대한 긴 진술을 지닌 셋째 부분이 있고, (4) 그 후에 교회와, 세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에 대한 주장이 뒤따라 나오고 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언급되는 이 신조의 내용은 칼시돈 공의회(451년)에서는 381년에 있었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졌지만 초기 권위자들은 콘스탄티노플 신조라 할 때의 의미를 449-50년에 개최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 연관시켜 이해한다. 성찬 예배 중에 복음서를 읽은 후에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고백하는 일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안디옥에서 Peter the Fuller (476-88 재위) 아래서 되어진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1,014년에 서방 교회가 이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이전에도 이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에서 번져 나갔다.
그리고 서방 교회에서는 제3차 톨레도 공의회(589)에서 성령에 대해 고백하는 중 “그리고 아들로부터도”(filioque)라는 문구가 덧붙여져서 서방 교회에서는 이 “아들로부터도”(filioque)를 함께 고백하는 일이 일반화 되었다. 서방 교회에서는 주일과 큰 축일들에만 이 신조를 사용하였다가고 한다. 동방교회에서는 이 “아들로부터도”(filioque)라는 어귀를 제외한 본래의 형태를 지닌 신조가 세례 신앙고백문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사실 이 보다 좀더 단순한 형태의 사도신경은 주로 서방교회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후에는 동방교회도 (비록 예배식이나 공식적 행사에서 사용하는 일은 없어도) 그 내용을 받아 들였다. 약 250년경의 로마 교회의 세례 고백문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도 신경이라는 표제 자체는 390년에 암브로시우스의 서신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고, 이런 옛 로마 신앙고백문을 더 확대한 지금의 형태는 8세기 초반 St. Pirminius에 의해서 처음 인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신앙 고백은 250년 이후로 교회에서 계속 믿어지고 고백되어 온 것이다.
우리들도 이 교회와의 연관성을 지닌 공교회에 속해 있는 교회임을 생각하면서 같은 신앙 고백을 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가 이단이 아닌 진정한 교회라면 역사상의 정통파 교회와 같은 신앙 고백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신앙 고백을 그 내용에 대한 이해 없이 고백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리고 그 내용을 가르치지 않고서 성도들이 그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처음 교회나 역사적인 교회는 정신을 차리고 바로 할 때에는 항상 사도신경이 언급하는 내용을 가르쳐 왔고, 대개는 그것을 설교 시간을 사용하여 가르쳤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 내용을 교회에서 설교와 여러 방법을 사용해서 가르쳐서 고대 교회와 함께 같은 신앙의 내용을 고백해야만 한다. 더구나 종교 개혁 교회는 중세 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고백하는 내용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바를 개혁하기 위해서 믿는바 내용을 성경에 근거하여 열심히 가르쳤다. 그래서 개신교도들은 자신이 고백하는 바를 아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였던 것을 명심하면서 오늘날의 개신교회도 그 믿는 바를 가르치는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2. 교리 설교와 그 의미
그러므로 교리를 가르치는 설교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 함께 신앙 고백하는 일의 중요성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과거의 공교회와 함께 성경에서 가르친 사도적 가르침을 그대로 고백하는 교회임을 드러내면서 함께 고백하는 것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사도적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고, 교리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같이 고백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사도들이 가르친 가르침의 내용을 성경에 근거해서 정확히 이해해 보려고 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우리의 믿고 있는 바를 바르게 고백하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고대 교회가 고백한 바를 바로 이해하고 그와 함께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2) 교회 교육의 방법으로서의 교리 설교
이와 함께 교리 설교는 다음 세대의 교회도 같은 고백을 하면서 같이 나아가기 위해 교회를 교육하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 세대가 제대로 신앙 고백하는 것으로 교회가 든든히 서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교회는 계대적(繼代的)으로 신앙을 지켜 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리 설교는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교육의 의미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밀접히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일단 함께 고백을 하는 과정이 의미 있으려면 교리(즉 우리들이 성경에 근거해서 믿는 바를) 잘 가르쳐야 하고, 같이 그 내용을 가르쳐야 모두가 제대로 고백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교리 설교의 방법
그런데 교리를 가르치는 설교에 대해서 많은 오해들이 있다. 그리고 그 오해 때문에 우리들은 교리를 가르치는 교리 설교를 하지 않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이 많다. 교리 설교에 대한 오해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를 가르치지 말고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탈 교리적인 성경적 설교를 해야 한다. (2) 교리 설교는 제목 설교와 같이 서로 연관성을 지니지 못한다, (3) 교리 설교는 딱딱하고, 너무 길어서 지루하다. 그리고 교리 설교는 재미가 없다. (4) 그러므로 교리 설교는 교회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다 오해인 것이다. 물론 교리 설교를 잘 하지 못하면 이것이 오해가 아니라 교리 설교의 현실을 드러내 주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교리 설교를 잘 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바른 교리 설교는 이런 오해를 극복하는 설교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1) “한번에 한 주제씩 성경을 강해하는 설교” 계획
먼저 교리 설교를 하려면 먼저 설교자가 명확한 계획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교리에 대한 설교는 교리적 진술을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믿는 바가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련의 교리 설교는 그 하나하나로 보면 성경을 강해하는 강해 설교가 될 수 있다. 강해 설교를 하는 하나의 방식은 본문을 연속해서 강해해 가면서 그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잘 드러내어 주는 방법이다. 그러나 또 다른 강해의 방법으로는 설교자가 성경의 본문을 익숙히 알고 있는 것에 근거해서 일정한 교리의 내용이 근거하고 있는 성경 본문을 잘 강해하는 식의 강해를 언급할 수 있다. 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설교자에게 교리 자체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성경 본문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만 한다. 교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그 교리가 과연 어떤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를 모르게 된다. 그렇게 알고 있는 교리는 우리가 그 성경적 근거를 분명히 하기 전까지는 무익한 것이 된다. 그런 식의 가르침에 계속되면 교리 설교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하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각각의 교리의 성경적 근거를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 교리를 설교할 때에는 그 근거가 되는 성경을 폭 넓은 관점에서 잘 주해한 것에 근거하여 그 안에 내포된 교리를 이끌어 내는 일을 해야 한다.
이 일을 제대로 행하면 그 결과로 성도들이 성경 본문을 잘 이해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교리라는 것이 그저 교회가 교조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해서 성경적 사상을 가지고 고백하는 것임을 잘 이해하게 된다. 이런 방식의 교리 설교는 그 자체만으로는 주어진 본문을 잘 강해하는 강해 설교가 되고, 그것의 교의적 내용을 도출해 내는 매우 교리적인 설교가 되며,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를 이끌어 내는 매우 실천적인 설교가 된다. 그러므로 그 한편의 설교가 연속적 강해의 한 부분이 될 때는 그 성경책에 대한 강해에 속해 있을 때나 별반 다름이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일반적 의미의 강해 설교에서도 그 본문에 담긴 교리의 의미를 드러내는 작업도 해야 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의도하는 바를 분명히 하는 일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좋은 교리 설교는 성경에 대한 바른 강해에서 나오는 것이며, 성경적인 설교가 된다. 다시 강조하자면, 좋은 교리 설교는 성경적 설교이고, 나쁜 교리 설교는 성경적이지 않은 설교이다. 또한 역으로, 성경적 교리를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 설교는 좋은 기독교 설교가 아니며, 좋은 기독교 설교는 성경의 교리적 내용을 바르게 이끌어 내어 그것이 성도의 사상이 되도록 하며, 그것에 따라 살게 하는 설교이다.
(2) “연속적인 설교” 계획
그러므로 좋은 교리 설교는 한번에 하는 설교가 될 수 없고, 연속적인 설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일련의 설교를 계획하고 수행할 때에 교리 설교의 진정한 의미가 잘 살아 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주일 아침 설교는 주어진 책들을 연속적으로 강해하는 강해 설교를 한다면, 주일 저녁 예배나 오후 예배 설교는 교리의 내용을 연속적으로 강해하는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식은 사도 신경의 내용을 몇 주에 걸쳐서 찬찬히 설명해 가는 것이다. 한 조항 한 조항의 고백이 과연 어떻게 성경적이고 어떤 성경적 근거를 지니고 있는 지를 드러내어 보이면 그것이 완성될 때 우리의 사도신경 고백이 진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지를 모든 교우들이 더 깊이 이해하는 터에서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과연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일련의 설교를 할 수도 있다. 한편 한편의 설교는 독립되어 있으면서 그 모든 설교가 연속해서 과연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잘 드러내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교리 설교는 항상 연속적인 기획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설교여야만 한다.
(3) “교리 설교의 다양성을 드러내는” 설교 계획
그리고 이런 설교를 할 때 우리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매번 설교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의 가르침의 깊은 의미를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매번 같은 방식으로만 설교하면 모든 이들이 설교가 진행되는 방향을 알기에 단조롭게 느끼며 교리 설교는 재미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교리 설교가 “지루하다, 딱딱하다, 재미없다”고 하는 것은 교리 설교 자체 때문에 나온 문제가 아니고, 설교를 하는 사람이 다양성 있게 제대로 설교 하지 못하여 생기는 오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한 방법을 매번 활동하여 우리가 가는 길을 잘 모르면서도 그 설교를 듣고 나면 성경적 교리가 마음에 새겨지고, 그런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살게끔 해야 하는 것이다.
(4)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교리 설교” 계획
이와 같이 진행되는 재미있고 다양성 있는 성경의 내용을 잘 알게 하고 그것이 함의하는 교리를 잘 이끌어 내는 설교는 결국 성도들을 건강하게 하고 이 땅에서 바른 사상을 가지고 살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교리 설교는 성도들, 즉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하는 것이다. 성경적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성경적 사상을 형성하게 되고, 성경적 삶을 향해 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4. 교리 설교의 한 예로써 요리문답 강해
이러한 교리 설교를 잘 했던 이전 시대의 교회의 좋은 예로 화란 개혁파 교회와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개혁파 교회에서 주일 오후나 저녁 시간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지속적으로 강해하던 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문답을 52주로 나누어 제시하던 때로부터 지속적으로 주일마다 오후나 저녁 시간에 이 내용을 가르치던 교회는 자신들이 고백하던 바를 명확히 알고, 그 성경적 근거를 분명히 하는 교회로 나타날 수 있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전통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일년에 이 내용에 대한 검토를 마치려 하지 말고 몇 년에 걸쳐서 그 내용을 강해하여 좀더 성경적 근거를 분명히 하는 방식으로 논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내용을 성경에 근거해서 강론하기만 한다면 교회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그 내용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 대한 강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가르치면 교리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음을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이다.
5. 결론: 한국에 건전한 교리 설교가 나타날 날을 기대하면서
이글을 마치면서 한국 교회에 진정하고도 매우 건전한 교리 설교가 나타나고 우리 사상을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날을 고대하게 된다. 물론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교자들이 성경 내용도 잘 알고 있어야 하고, 교리의 내용도 잘 알고 있어야 하며, 성경을 무리하게 끌어가지 않는 노력도 해야 하며, 생동감 있게 현실적인 적용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도들이 처한 정황도 잘 알아야 하고 성도들의 현실적인 문제와 그 때의 사고방식도 잘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그로부터 성경적인 방향으로 성도들의 사고방식과 사고 내용을 고쳐 가고 효과적으로 그런 내용의 변환을 이루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설교는 성경적이어야 하며, 성경에 근거한 교리에 충실한 것이어야 하고, 현실에 적합성을 지녀야 하고, 성도와 교회를 변혁시키는 능력도 지닌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것이 함께 있어야 좋은 설교인 것이다. 우리들이 교회의 설교는 모두 이런 설교일 수 있었으면 한다. 언제 어디서 설교를 듣던지, 성경의 내용을 바르게 알게 되고, 그것이 가르치려는 교리를 정확히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를 이끌어 나가는 바를 향해 강하게 나가도록 하는 설교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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