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기독교 강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승구(조직신학, 합동신학대학원)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 탄생 500주년을 맞아 그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하는 가장 손쉬운 길의 하나는 그의 주저인 『기독교 강요』를 잘 살펴보는 일이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이해해 보고 살펴보는 우리의 책무을 다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기독교 강요』를 잘 살펴보는 일은 칼빈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매우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 출발 점을 기점으로 해서 칼빈의 여러 글을 읽고 깊이 생각한다면 칼빈 탄생 500주년을 제대로 기념하며 그의 사상을 기리는 일이 될 것이다.
1. 칼빈의 『기독교 강요』작성 동기와 전개 과정
천주교인으로 태어나서 아마도 볼마르에게서 헬라어를 배우던, 그리고 사촌인 올리베탕에게서 성경을 읽을 것과 천주교적 의식에서 벗어 날 것을 권유받던 1528년부터 1533년 니꼴라 꼽(Nicholas Cop)의 연설 기간 사이에 개신교적인 성경 중심적 신앙으로 변개(變改)하게 된 칼빈은 그가 27세 되던 해인 1536년 3월에 스위스 바젤의 출판업자들에 의해서 그가 쓴 『기독교 강요』초판이 발간되는 기쁨을 맛본다. 인문학자로서의 칼빈의 최초의 저서는 세네카(Seneca)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이었고(1532), 교회를 위한 최초의 신학적 저술 중은 작은 책이 영혼수면설을 반박하는 Psychopannichia였다면(1535), 본격적으로 교회를 위한 글을 쓴 것으로서는 『기독교 강요』초판이(1536) 칼빈의 신학적 논의의 본격적 기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은 자신이 『기독교 강요』를 쓰게 된 동기를 (1) 기본적으로 그리스도를 잘 모르는 일반 민중들에게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한 초보적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기독교 신앙의 진술이요 간단한 설명으로 시작되었다(신앙고백서와 신앙 해설서로서의 『기독교 강요』). 그러므로 이 책을 “새로운 신자들의 교회의 책”이라고 하는 말은 매우 적절한 말이다. 또한 (2) 이를 당시 프랑스의 왕이던 프랑소와 I 세에게 헌정하면서 칼빈은 이 책이 진정한 의미의 변증서가 되도록 했다(변증서로서의 『기독교 강요』). 개신교도들이 믿고 주장하는 바는 새로운 것이 아니요 사도들이 가르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요, 교부들의 가르침 가운데서 성경에 충실한 것일 뿐이니, 이들은 잘못된 내용을 믿거나 주장하는 것도 아니요, 개신교도들은 프랑스를 비롯한 국가를 전복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칼빈은 이 서문을 통해서 개신교에 대한 변증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후에 (3) 칼빈은 회고하면서 자신이 이 책을 쓴 이유가 성경 공부를 하려는 자들에게 바른 성경 공부를 위한 지침을 주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성경 공부 안내서로서의 『기독교 강요』). 이 강요를 통해서 기독교 가르침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하고서 성경을 공부하게 되면 성경을 잘 해석하고 바르게 보며 방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출간된 라틴어로 쓰여진『기독교 강요』는 점차 확장되어 1537년 초에 좀더 단순하고 평이한 불어판이 나오고, 1939년의 2판, 1541년의 불어판, 1543년에 라틴어 3판 (이에 따른 1545년 불어판), 1550년에 라틴어 4판 (이에 따른 1551년 불어판), 그리고 1559년 최종판인 라틴어 5판(이에 따른 1560년 불어판)이 나오게 된다. 처음(1536)에는 간단하게 설명하는 책이 23년 후에 나온 최종판(1559)에서는 상당한 두께의 책이 된 것이다.
2.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내용
칼빈의 『기독교 강요』초판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람에 대한 지식이 있고, 이 둘이 연관되어 있다는 유명한 말로부터 시작해서, 그 후에는 루터의 신앙 문답서와 비슷하게 십계명을 설명하면서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복음의 필요성, 그리고 복음을 믿는 자들의 삶의 원리를 잘 드러내고, 사도신경을 가지고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정확히 설명하며, 그 후에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중심으로 기도에 대해서 설명한 후에 교회의 성례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성경적인 두 가지 성례[세례와 성찬] 외에 천주교회가 덧붙여 말하는 “다섯 성례에 관하여” 비교적 자세한 논박을 가하고 있다. 그리고는 “기독교적 자유에 대하여와 교회의 권세, 그리고 세상 권세”에 대한 설명으로 마치고 있다.
이와 같이 『기독교 강요』 초판의 내용은 성경의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이 반드시 믿어야 할 내용과 그에 따라서 우리의 사유와 교회 의식과 제도와 세상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고쳐야 할 것들을 잘 제시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후에 이를 확대하면서 칼빈은 자신이 경험한 수많은 논쟁들을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들을 열거하고 그것들을 반박하면서 성경적으로 바른 견해가 무엇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경,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정 일반과 예정, 창조와 섭리, 하나님 형상에 대한 이해, 그리스도의 양성론에 대한 철저한 이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이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mistica)에 근거한 구원 이해, 교회와 성만찬 등등의 모든 문제에 대한 성경적 입장이 잘 진술되어졌다. 그리하여 『기독교 강요』최종판만을 잘 읽어도 16세기 성경적 그리스도인들이 이전 시대와 관련해서 성경적으로 바르게 생각하는 견해가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3.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중심 사상
이 모든 것에서 드러나는 칼빈의 중심적 사상은 어떤 것일까?
첫째로, 내용상 형식적인 면을 중심으로 말한다면 칼빈은 성경을 중심으로 한 사상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요한 칼빈의 이해는 너무나도 분명하여 이에 대한 다른 논의를 허락하지 않을 정도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 이외에는 성경에 버금가는 권위가 없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빈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한다. 그런데 그것은 구호로만 나타나지 않고 교회의 믿는 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가르치는 것으로 결론 내리도록 하려고 구체적으로 애쓴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믿는다고 하는 내용 가운데서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내용들을 다 버려 버리고,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철저화 한 것이 칼빈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하나님 주권 사상을 제시한다. 이는 그의 사유 전체에서 일관하여 나타나는 일종의 방향성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gloria Dei)이다. 따라서 모든 문제에 대해서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인정되고, 더 많이 긍정 되고, 더 높여 지는 식으로 사유되는 것이 옳다고 한다. 이것이 칼빈이 사유하는 방향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더 인정되는 지를 찾아보고 모든 생각을 그런 방향으로 가도록 하는 것이 그가 나아가는 방향이라는 말이다. 그 결과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재권에 대한 인정이 그의 책 도처에 찬연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인간의 구원에 대한 이해에서도 성경의 가르침과 궁극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아주 강조되어 인간을 구원하는 것도 인간중심적이지 않은 것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칼빈은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만 말미암는다고 하는 구원 사역에서의 하나님 독력주의(獨力主義, monergism)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께서 당신님 혼자의 힘으로 하신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방식, 따라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방식으로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에 대한 이해도 하나님 중심으로 나타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은 반드시 그 열매를 내도록 되어 있음을 아주 분명히 하고, 이에 대한 다른 생각은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 유명한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에 대한 이해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십자가나 하나님의 능력을 약화시키거나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유효성(有效性)을 강하게 긍정하는 사상인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취소되거나 파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주권이 공존하는 방식으로 칼빈의 신학적 진술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그를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는 한 순간도 하나님의 주권을 잊어버리는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것이 숙명론이나 운명론적인 방향으로 잘못 발전되어 나아가게끔 허용하지도 않는다. 숙명론이나 운명론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초칼빈주의(hyper-Calvinism)은 칼빈주의가 아니고 비성경적인 사상이다. 이는 결국 인간의 타락을 필연화하며 그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게 나타나는 좋은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지나치게 결과를 중시하는 잘못된 사유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에게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 자유가 모두 강조되면서 그 각각이 매우 분명히 드러난다.
셋째로, 칼빈은 그리스도의 삶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어야 함을 아주 분명히 제시한다. 따라서 칼빈의 글에는 하나님께 최대한의 영광이 되려면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율법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으로 보고 해석해야 한다는 소위 “율법의 제 3의 용도”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칼빈은 처음부터 성화와 성경적이고 성령론적 윤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칼빈이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은 항상 성화 과정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고 성령론적 윤리를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넷째로, 칼빈은 교회의 직분들조차도 당대의 천주교회적인 구조를 탈피해서 성경이 말하는 직분에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매우 강하게 주장한다. 이런 데서 전통을 벗어나 성경적으로 가는 모습의 매우 실천적인 측면이 잘 나타나는 것이다. 이로부터 성도 가운데 장로와 집사를 선출하여 함께 교회의 봉사자들로 섬기게 하는 일의 회복이 나타나게 되었다. 칼빈의 후예들은 피흘리면서 이런 직분들을 회복하고 지키며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직ㅂ분적 본사를 힘써 왔다. 이 모든 직분은 섬기는 직이고, 따라서 모든 직분이 평등하며 교회, 즉 성도를 섬기는 직분이다.
다섯째로, 하나님께 예배할 때도 우리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예배의 동기와 방식을 생각하고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었다. 루터(Martin Luther)가 성상(聖像) 숭배를 제외한 예배의 문제를 양자가택(adiaphora)적 문제로 간주하고 상당히 자유로운 입장을 취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칼빈 선생님은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 규정된 대로의 적법한 예배”를 하는 것을 매우 강조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에 근거해서 우리의 삶과 예배로 “그들의 존재 전체와 그들의 모든 행위들을 하나님께 갚아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드린다(Institutes, IV. xviii. 13). 예배를 이렇게 이해하는 칼빈은 교회 개혁에 관여하면서부터 교회의 예배를 성경이 말하는 요소를 중심으로 정비해 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칼빈은 이 세상 전체가 모두 다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는 것으로 보며 이 세상 안에서 성도들의 활동을 매우 강조하였다. 성도들의 교회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활발한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칼빈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정태적인 사람들이 아니고, 이 세상 한 가운데서 항상 하나님과 교제 하는 가운데서 활발하게 활동해 가는 사람들이다.
4.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의 『기독교 강요』
이를 생각할 때 21세기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찬찬히 읽어 가는 것이 여러 면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칼빈 자신이나 그가 쓴 특정한 책이 귀해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책과 여러 사역을 통해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는 성경적인 방향이 귀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우리를 그를 따라 가는 사람이게끔 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말하자면 칼빈은 자신의 제자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성경을 따라가는 사람이 될 때,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사람이 될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낄 것이다. 칼빈의 글을 읽는 우리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칼빈의 글을 보면서 그가 제시한 성경적 사상을 잘 발견하고, 그것을 여기 우리들의 삶의 영역 가운데서도 잘 드러내는 일이 우리의 사명일 것이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칼빈의 글을 읽고서 결국은 성경의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칼빈은 그를 진정한 그의 독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칼빈이 당대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방향으로 돌아오도록 외치고 바로 그것을 위해『기독교 강요』를 쓰고 개정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교회론적 진공 상태에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잘못된 가르침이 큰 성채와 같이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을 때 그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이 가장 성경적 사상을 배워서 그 성채 같은 무서운 구조로부터 나이와 자유하며 동시에 진정 성경의 가르침을 받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가 이 책을 썼던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뜻에서 우리들은 한편으로는 『기독교 강요』를 잘 살펴보면서 그가 배제하려고 하고 그가 이끌어 가려고 한 것을 잘 찾아보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들 주변을 돌아보면서 우리 주변에 있는 잘못된 생각과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살펴서 그 모든 것으로부터 나아와 진정 자유하며, 그러나 동시에 가장 성경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추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이 시대에 『기독교 강요』를 읽는 진정한 독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구(조직신학, 합동신학대학원)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 탄생 500주년을 맞아 그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하는 가장 손쉬운 길의 하나는 그의 주저인 『기독교 강요』를 잘 살펴보는 일이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이해해 보고 살펴보는 우리의 책무을 다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기독교 강요』를 잘 살펴보는 일은 칼빈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매우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 출발 점을 기점으로 해서 칼빈의 여러 글을 읽고 깊이 생각한다면 칼빈 탄생 500주년을 제대로 기념하며 그의 사상을 기리는 일이 될 것이다.
1. 칼빈의 『기독교 강요』작성 동기와 전개 과정
천주교인으로 태어나서 아마도 볼마르에게서 헬라어를 배우던, 그리고 사촌인 올리베탕에게서 성경을 읽을 것과 천주교적 의식에서 벗어 날 것을 권유받던 1528년부터 1533년 니꼴라 꼽(Nicholas Cop)의 연설 기간 사이에 개신교적인 성경 중심적 신앙으로 변개(變改)하게 된 칼빈은 그가 27세 되던 해인 1536년 3월에 스위스 바젤의 출판업자들에 의해서 그가 쓴 『기독교 강요』초판이 발간되는 기쁨을 맛본다. 인문학자로서의 칼빈의 최초의 저서는 세네카(Seneca)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이었고(1532), 교회를 위한 최초의 신학적 저술 중은 작은 책이 영혼수면설을 반박하는 Psychopannichia였다면(1535), 본격적으로 교회를 위한 글을 쓴 것으로서는 『기독교 강요』초판이(1536) 칼빈의 신학적 논의의 본격적 기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은 자신이 『기독교 강요』를 쓰게 된 동기를 (1) 기본적으로 그리스도를 잘 모르는 일반 민중들에게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한 초보적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기독교 신앙의 진술이요 간단한 설명으로 시작되었다(신앙고백서와 신앙 해설서로서의 『기독교 강요』). 그러므로 이 책을 “새로운 신자들의 교회의 책”이라고 하는 말은 매우 적절한 말이다. 또한 (2) 이를 당시 프랑스의 왕이던 프랑소와 I 세에게 헌정하면서 칼빈은 이 책이 진정한 의미의 변증서가 되도록 했다(변증서로서의 『기독교 강요』). 개신교도들이 믿고 주장하는 바는 새로운 것이 아니요 사도들이 가르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요, 교부들의 가르침 가운데서 성경에 충실한 것일 뿐이니, 이들은 잘못된 내용을 믿거나 주장하는 것도 아니요, 개신교도들은 프랑스를 비롯한 국가를 전복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칼빈은 이 서문을 통해서 개신교에 대한 변증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후에 (3) 칼빈은 회고하면서 자신이 이 책을 쓴 이유가 성경 공부를 하려는 자들에게 바른 성경 공부를 위한 지침을 주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성경 공부 안내서로서의 『기독교 강요』). 이 강요를 통해서 기독교 가르침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하고서 성경을 공부하게 되면 성경을 잘 해석하고 바르게 보며 방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출간된 라틴어로 쓰여진『기독교 강요』는 점차 확장되어 1537년 초에 좀더 단순하고 평이한 불어판이 나오고, 1939년의 2판, 1541년의 불어판, 1543년에 라틴어 3판 (이에 따른 1545년 불어판), 1550년에 라틴어 4판 (이에 따른 1551년 불어판), 그리고 1559년 최종판인 라틴어 5판(이에 따른 1560년 불어판)이 나오게 된다. 처음(1536)에는 간단하게 설명하는 책이 23년 후에 나온 최종판(1559)에서는 상당한 두께의 책이 된 것이다.
2.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내용
칼빈의 『기독교 강요』초판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람에 대한 지식이 있고, 이 둘이 연관되어 있다는 유명한 말로부터 시작해서, 그 후에는 루터의 신앙 문답서와 비슷하게 십계명을 설명하면서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복음의 필요성, 그리고 복음을 믿는 자들의 삶의 원리를 잘 드러내고, 사도신경을 가지고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정확히 설명하며, 그 후에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중심으로 기도에 대해서 설명한 후에 교회의 성례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성경적인 두 가지 성례[세례와 성찬] 외에 천주교회가 덧붙여 말하는 “다섯 성례에 관하여” 비교적 자세한 논박을 가하고 있다. 그리고는 “기독교적 자유에 대하여와 교회의 권세, 그리고 세상 권세”에 대한 설명으로 마치고 있다.
이와 같이 『기독교 강요』 초판의 내용은 성경의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이 반드시 믿어야 할 내용과 그에 따라서 우리의 사유와 교회 의식과 제도와 세상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고쳐야 할 것들을 잘 제시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후에 이를 확대하면서 칼빈은 자신이 경험한 수많은 논쟁들을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들을 열거하고 그것들을 반박하면서 성경적으로 바른 견해가 무엇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경,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정 일반과 예정, 창조와 섭리, 하나님 형상에 대한 이해, 그리스도의 양성론에 대한 철저한 이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이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mistica)에 근거한 구원 이해, 교회와 성만찬 등등의 모든 문제에 대한 성경적 입장이 잘 진술되어졌다. 그리하여 『기독교 강요』최종판만을 잘 읽어도 16세기 성경적 그리스도인들이 이전 시대와 관련해서 성경적으로 바르게 생각하는 견해가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3.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중심 사상
이 모든 것에서 드러나는 칼빈의 중심적 사상은 어떤 것일까?
첫째로, 내용상 형식적인 면을 중심으로 말한다면 칼빈은 성경을 중심으로 한 사상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요한 칼빈의 이해는 너무나도 분명하여 이에 대한 다른 논의를 허락하지 않을 정도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 이외에는 성경에 버금가는 권위가 없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빈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한다. 그런데 그것은 구호로만 나타나지 않고 교회의 믿는 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가르치는 것으로 결론 내리도록 하려고 구체적으로 애쓴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믿는다고 하는 내용 가운데서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내용들을 다 버려 버리고,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철저화 한 것이 칼빈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하나님 주권 사상을 제시한다. 이는 그의 사유 전체에서 일관하여 나타나는 일종의 방향성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gloria Dei)이다. 따라서 모든 문제에 대해서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인정되고, 더 많이 긍정 되고, 더 높여 지는 식으로 사유되는 것이 옳다고 한다. 이것이 칼빈이 사유하는 방향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더 인정되는 지를 찾아보고 모든 생각을 그런 방향으로 가도록 하는 것이 그가 나아가는 방향이라는 말이다. 그 결과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재권에 대한 인정이 그의 책 도처에 찬연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인간의 구원에 대한 이해에서도 성경의 가르침과 궁극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아주 강조되어 인간을 구원하는 것도 인간중심적이지 않은 것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칼빈은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만 말미암는다고 하는 구원 사역에서의 하나님 독력주의(獨力主義, monergism)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께서 당신님 혼자의 힘으로 하신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방식, 따라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방식으로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에 대한 이해도 하나님 중심으로 나타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은 반드시 그 열매를 내도록 되어 있음을 아주 분명히 하고, 이에 대한 다른 생각은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 유명한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에 대한 이해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십자가나 하나님의 능력을 약화시키거나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유효성(有效性)을 강하게 긍정하는 사상인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취소되거나 파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주권이 공존하는 방식으로 칼빈의 신학적 진술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그를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는 한 순간도 하나님의 주권을 잊어버리는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것이 숙명론이나 운명론적인 방향으로 잘못 발전되어 나아가게끔 허용하지도 않는다. 숙명론이나 운명론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초칼빈주의(hyper-Calvinism)은 칼빈주의가 아니고 비성경적인 사상이다. 이는 결국 인간의 타락을 필연화하며 그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게 나타나는 좋은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지나치게 결과를 중시하는 잘못된 사유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에게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 자유가 모두 강조되면서 그 각각이 매우 분명히 드러난다.
셋째로, 칼빈은 그리스도의 삶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어야 함을 아주 분명히 제시한다. 따라서 칼빈의 글에는 하나님께 최대한의 영광이 되려면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율법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으로 보고 해석해야 한다는 소위 “율법의 제 3의 용도”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칼빈은 처음부터 성화와 성경적이고 성령론적 윤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칼빈이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은 항상 성화 과정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고 성령론적 윤리를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넷째로, 칼빈은 교회의 직분들조차도 당대의 천주교회적인 구조를 탈피해서 성경이 말하는 직분에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매우 강하게 주장한다. 이런 데서 전통을 벗어나 성경적으로 가는 모습의 매우 실천적인 측면이 잘 나타나는 것이다. 이로부터 성도 가운데 장로와 집사를 선출하여 함께 교회의 봉사자들로 섬기게 하는 일의 회복이 나타나게 되었다. 칼빈의 후예들은 피흘리면서 이런 직분들을 회복하고 지키며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직ㅂ분적 본사를 힘써 왔다. 이 모든 직분은 섬기는 직이고, 따라서 모든 직분이 평등하며 교회, 즉 성도를 섬기는 직분이다.
다섯째로, 하나님께 예배할 때도 우리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예배의 동기와 방식을 생각하고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었다. 루터(Martin Luther)가 성상(聖像) 숭배를 제외한 예배의 문제를 양자가택(adiaphora)적 문제로 간주하고 상당히 자유로운 입장을 취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칼빈 선생님은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 규정된 대로의 적법한 예배”를 하는 것을 매우 강조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에 근거해서 우리의 삶과 예배로 “그들의 존재 전체와 그들의 모든 행위들을 하나님께 갚아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드린다(Institutes, IV. xviii. 13). 예배를 이렇게 이해하는 칼빈은 교회 개혁에 관여하면서부터 교회의 예배를 성경이 말하는 요소를 중심으로 정비해 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칼빈은 이 세상 전체가 모두 다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는 것으로 보며 이 세상 안에서 성도들의 활동을 매우 강조하였다. 성도들의 교회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활발한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칼빈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정태적인 사람들이 아니고, 이 세상 한 가운데서 항상 하나님과 교제 하는 가운데서 활발하게 활동해 가는 사람들이다.
4.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의 『기독교 강요』
이를 생각할 때 21세기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찬찬히 읽어 가는 것이 여러 면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칼빈 자신이나 그가 쓴 특정한 책이 귀해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책과 여러 사역을 통해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는 성경적인 방향이 귀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우리를 그를 따라 가는 사람이게끔 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말하자면 칼빈은 자신의 제자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성경을 따라가는 사람이 될 때,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사람이 될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낄 것이다. 칼빈의 글을 읽는 우리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칼빈의 글을 보면서 그가 제시한 성경적 사상을 잘 발견하고, 그것을 여기 우리들의 삶의 영역 가운데서도 잘 드러내는 일이 우리의 사명일 것이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칼빈의 글을 읽고서 결국은 성경의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칼빈은 그를 진정한 그의 독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칼빈이 당대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방향으로 돌아오도록 외치고 바로 그것을 위해『기독교 강요』를 쓰고 개정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교회론적 진공 상태에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잘못된 가르침이 큰 성채와 같이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을 때 그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이 가장 성경적 사상을 배워서 그 성채 같은 무서운 구조로부터 나이와 자유하며 동시에 진정 성경의 가르침을 받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가 이 책을 썼던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뜻에서 우리들은 한편으로는 『기독교 강요』를 잘 살펴보면서 그가 배제하려고 하고 그가 이끌어 가려고 한 것을 잘 찾아보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들 주변을 돌아보면서 우리 주변에 있는 잘못된 생각과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살펴서 그 모든 것으로부터 나아와 진정 자유하며, 그러나 동시에 가장 성경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추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이 시대에 『기독교 강요』를 읽는 진정한 독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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