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예배에 참석하는 자녀들
(소리나라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고재수 교수
화란 개혁교회에서는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교회를 다니고 부모와 함께 예배에 참석한다. 즉 부모와 따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예배에 참석한다는 말이다. 아이들이 3,4세가 되면 일반적으로 주일에 한 번 씩 참석하지만 6,7세가 될 때부터는 오전과 오후예배에 다 참석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성도의 자녀들은 교회에 속한다는 확신 때문이다. 아이들 역시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언약의 일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받았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로 나갈 때 그들의 자녀도 가능한 한 참석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이들에게도 중요한 것이다. 교회에서는 남편과 아내, 주인과 종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녀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엡6:1-4). 어린아이들을 예배에 참석시킨다고 할 때 말은 쉽지만 그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잘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화란 개혁교회는 이 문제를 여러 번 심사숙고한 끝에 작년에 여기에 대한 책을 두 권 출판하였다. 책이 나오자 지난 봄에 화란 개혁교회의 신문에서는 그것에 관계된 토론을 6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다음 글은 그 토론에 근거된 것이다. 자녀교육의 일관성 자녀들도 교회의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는 토론에서 단지 교회의 역할이 강조된 것만은 아니다. 물론 교회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 그리고 그의 요구에 관해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자녀의 종교적 교육에 관한 첫째 책임은 교회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책임은 우선적으로 부모에게 있다.
부모는 자기 아들이나 딸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 문에 하나님 앞에서 교육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출 12:36, 13:14, 신6:6, 11:19). 부모는 자기 자녀의 세례식 때 그것도 서약해야 한다. 그들의 서약 중 이런 질문이 있다. "여러분은 이 자녀가 자라나는 동안 이 자녀를 구신약의 교리로 가르치고 또 가르치게 할 것을 약속하십니까?" 이때 부모가 자녀를 가르친다는 약속은 그들 자신이 자녀에게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부모가 자녀를 구신약 교리를 가르친다고 한 약속은 학교교육에 영향을 미친다. 사실 이 약속은 화란개혁교회로 하여금 많은 국민학교를 설립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가능하다면 학교도 아이들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협력해야 한다. 그래서 화란에서는 개혁주의 학교를 설립할 자유가 있기 때문에 개혁주의 국민학교가 많다(월간고신 1982년 3,4월호의 필자의 글을 참고하라).
이처럼 신앙 안에서의 자녀교육이라고 하면 이 세 가지 곧 부모, 학교, 교회가 관련되어 있다. 자녀의 교육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화란 개혁교회안에서 자녀들이 어떻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토론될 때 이 세 가지가 항상 거론되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세 가지 곧 부모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교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겠다. 교회의 임무 부모가 어린 자녀들을 교회에 데려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엔 우선 목사가 할 일이 있다.
예를 들어 목사가 예배의 순서들을 잘 소개하고 자주 설명하면 어린이들에게 퍽 유익하다. 대개 목사는 자기가 늘 사용하는 표현대로 예배순서를 소개한다. 이러한 표현에는 고리타분하고 문학적인 수사가 동원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그러한 표현을 잘 이해할 수 없다. 때문에 예배순서를 설명할 때 아이들도 잘 이해할 수 있는 일상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한 목사가 자주 예배순서들의 의미를 소개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예를 들어 목사는 찬송을 소개할 때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설명할 수 도 있다. 또 다른 예로서 목사는 헌금을 소개할 때 교회가 그 돈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예배는 자녀들 뿐 아니라 많은 어른들에게도 참여하기가 더욱 쉬운 것을 다가올 것이다. 또 설교도 아주 중요하다.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어른만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면 아이들은 그 설교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쉽다. 그러나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마음의 문으로 아이들도 바라본다면 쉽게 본문의 내용을 설명하려고 애를 쓸 것이다. 이러한 태도로 준비하면 적용에서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의 어린이들에게도 중요한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목사는 본문을 적용할 때 어른을 위한 것만을 제시해서는 안된다. 어린이들의 생활에 중요한 문제들도 적용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목사는 본문을 가지고 학생이 국민학교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설명할 수 도 있다.
그런데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설교하면서 자녀들에게 말할 수 있는 목사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목사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앞서 언급했던 토론에서 어느 목사는 자기의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즉 목사는 설교 각 부분의 마지막에 항상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과 방식으로 그 부분의 주된 내용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그들을 위한 부문이 나올 줄 알고 그것을 몹시 기다린다. 목사가 한 번은 아이들을 위한 부분을 생략했는데, 그때 아이들이 실망한 표정으로 목사에게 그들을 위한 설명은 어디 있느냐고 불평했다고 한다. 설교의 주된 내용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할 때 또 다른 유익이 있다. 그것은 어른들에게도 되풀이가 되기에 그것을 통해 성경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설교한다면 모든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목사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아이들이 예배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교회의 조용한 분위기를 거룩한 분위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예배의 분위기가 어떤 움직임에 의해 방해받는다고 생각하기에 아이가 예배시간에 좀 움직이는 것에도 못견디는 맘으로 화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가 한 시간 이상 조용히 앉아 있기란 불가능하며 또 꼭 필요한 일도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예배시간에 있는 조그만 소란과 움직임은 교회의 생명을 상징힌다. 어린이가 없는 교회에 움직임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조금 시끄럽더라도 어린이가 있는 교회는 그 앞날이 밝다. 학교의 임무 아이가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도울 수 있는 일을 무엇일까? 아까 말한대로 화란에는 대부분의 도시에 개혁주의 국민학교가 있으며 시골의 아이들은 버스를 타고서라도 그 학교에 가는 형편이다. 그런 학교의 시간표 가운데는 주간의 찬송이란 것이 꼭 들어 있다. 이 시간을 통해 매주 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편이나 다른 노래의 한 절을 배운다.
앞서의 신문에서는 목사와 학교선생이 여기에 협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학교선생은 주간에 아이들이 배운 시편을 목사에게 이야기하고 목사는 바로 그 시편을 예배시간에 함께 부르도록 한다. 그때 참여한 아이들은 매우 기뻐하며 그 찬송을 신나게 부른다. 아이들이 변성되지 않은 맑은 소리로 찬송을 부를 때 찬송은 정말 깊이가 있고 즐거운 것이 된다. 화란의 개혁주의 국민학교에서는 성경이야기도 가르친다. 또 학교 교과과정에서는 3학년부터 "성경에 기록된 역사"라는 과목이 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 왕,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을 배운다. 이 시간을 통해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깨달았을 뿐 아니라 성경에 무슨 책들이 있는가를 익힌다.
이 모든 교육으로 인해 아이들은 설교를 더 잘 이해하고 예배도 더 잘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부모의 임무 부모의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양육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 일은 말로 할 수 있고 행동으로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주일을 자녀에게 즐거운 날로 만들어 주기 위해 애를 쓴다고 이야기했다.
자녀의 주일 아침 식사에는 특별히 맛있는 것을 준비한다고 하는데 그럼으로써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주일날이 특별한 날 임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자주 자녀들은 '오늘이 주일인데 어떤 맛있는 것을 먹을 겁니까?'라고 질문한다. 그때 부모는 '그렇지 우리는 교회에 가기 때문이란다'라고 대답한다. 이처럼 자녀들은 교회에 나가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고 느낀다. 물론 부모는 자녀들이 교회에 나가도록 준비해야 한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교회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고 말만 해서는 안된다.
그 대신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또 부모는 자녀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가르쳐야 한다. 이처럼 부모는 자녀에게 예배에 대한 의미를 설명해야 한다. 중요한 또 하나는 부모가 예배 후 자녀와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이해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물어 보아야 한다. 특별히 '설교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지만 아이들은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부모는 자녀가 이해할 수 있는 차원에서 설교가 의미하는 것을 설명한다. 또 그들은 설교가 자녀들의 생활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주일날은 부모들에게 자녀의 기독교교육을 위해 특히 바쁜 날이다. 부모의 태도도 매우 중요하다. 부모가 교회에 가는 일에 괸심이 없거나 설교시간에 졸거나 오전예배만 참석하고 오후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자녀에게 예배가 중요하지 않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그런 경우 자녀에게 교회에 열심히 나가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아이들은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열심있는 부모는 자녀들을 열심히 교회에 데리고 나간다. 결과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예배에 참석한 결과는 무엇인가? 그런 것은 소용없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많이 설명해도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많을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한 반론은 '결과는 성령님께 맡기고 부모는 자기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즉 부모는 자녀를 교회에 데리고 가야만 하고 성령님은 그 때 자녀들에게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 예배를 사용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어린이와 예배와 설교의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가지는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교회에 나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 부모는 이처럼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며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함을 그들에게 행동으로 가르친다. 두 번째로 자녀들이 예배와 설교에 대해 우리의 기대보다 많은 것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내가 직접 본 실례를 여기서 언급하겠다. 봉사하던 '레이던(Leiden)교회'에서 고전 15:35이하에 대해 설교했다.
그 설교의 주제는 장례가 기독교인에게는 씨를 뿌리는 것이라는 어려운 내용이었다. 설교 자체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두 주간 후에 장로 한 분이 돌아가셨는 데 너무 뜻밖이어서 교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여덟살이 된 어린 딸이 자기 부모에게 그 설교의 내용을 말하고 그들을 위로했다. 그 아이는 설교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화란의 개혁교회는 자녀와 같이 교회에 가는 일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예배에 아이들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는 교회생활의 표시인 것이다.
(소리나라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고재수 교수
화란 개혁교회에서는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교회를 다니고 부모와 함께 예배에 참석한다. 즉 부모와 따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예배에 참석한다는 말이다. 아이들이 3,4세가 되면 일반적으로 주일에 한 번 씩 참석하지만 6,7세가 될 때부터는 오전과 오후예배에 다 참석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성도의 자녀들은 교회에 속한다는 확신 때문이다. 아이들 역시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언약의 일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받았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로 나갈 때 그들의 자녀도 가능한 한 참석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이들에게도 중요한 것이다. 교회에서는 남편과 아내, 주인과 종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녀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엡6:1-4). 어린아이들을 예배에 참석시킨다고 할 때 말은 쉽지만 그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잘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화란 개혁교회는 이 문제를 여러 번 심사숙고한 끝에 작년에 여기에 대한 책을 두 권 출판하였다. 책이 나오자 지난 봄에 화란 개혁교회의 신문에서는 그것에 관계된 토론을 6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다음 글은 그 토론에 근거된 것이다. 자녀교육의 일관성 자녀들도 교회의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는 토론에서 단지 교회의 역할이 강조된 것만은 아니다. 물론 교회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 그리고 그의 요구에 관해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자녀의 종교적 교육에 관한 첫째 책임은 교회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책임은 우선적으로 부모에게 있다.
부모는 자기 아들이나 딸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 문에 하나님 앞에서 교육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출 12:36, 13:14, 신6:6, 11:19). 부모는 자기 자녀의 세례식 때 그것도 서약해야 한다. 그들의 서약 중 이런 질문이 있다. "여러분은 이 자녀가 자라나는 동안 이 자녀를 구신약의 교리로 가르치고 또 가르치게 할 것을 약속하십니까?" 이때 부모가 자녀를 가르친다는 약속은 그들 자신이 자녀에게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부모가 자녀를 구신약 교리를 가르친다고 한 약속은 학교교육에 영향을 미친다. 사실 이 약속은 화란개혁교회로 하여금 많은 국민학교를 설립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가능하다면 학교도 아이들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협력해야 한다. 그래서 화란에서는 개혁주의 학교를 설립할 자유가 있기 때문에 개혁주의 국민학교가 많다(월간고신 1982년 3,4월호의 필자의 글을 참고하라).
이처럼 신앙 안에서의 자녀교육이라고 하면 이 세 가지 곧 부모, 학교, 교회가 관련되어 있다. 자녀의 교육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화란 개혁교회안에서 자녀들이 어떻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토론될 때 이 세 가지가 항상 거론되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세 가지 곧 부모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교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겠다. 교회의 임무 부모가 어린 자녀들을 교회에 데려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엔 우선 목사가 할 일이 있다.
예를 들어 목사가 예배의 순서들을 잘 소개하고 자주 설명하면 어린이들에게 퍽 유익하다. 대개 목사는 자기가 늘 사용하는 표현대로 예배순서를 소개한다. 이러한 표현에는 고리타분하고 문학적인 수사가 동원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그러한 표현을 잘 이해할 수 없다. 때문에 예배순서를 설명할 때 아이들도 잘 이해할 수 있는 일상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한 목사가 자주 예배순서들의 의미를 소개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예를 들어 목사는 찬송을 소개할 때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설명할 수 도 있다. 또 다른 예로서 목사는 헌금을 소개할 때 교회가 그 돈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예배는 자녀들 뿐 아니라 많은 어른들에게도 참여하기가 더욱 쉬운 것을 다가올 것이다. 또 설교도 아주 중요하다.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어른만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면 아이들은 그 설교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쉽다. 그러나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마음의 문으로 아이들도 바라본다면 쉽게 본문의 내용을 설명하려고 애를 쓸 것이다. 이러한 태도로 준비하면 적용에서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의 어린이들에게도 중요한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목사는 본문을 적용할 때 어른을 위한 것만을 제시해서는 안된다. 어린이들의 생활에 중요한 문제들도 적용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목사는 본문을 가지고 학생이 국민학교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설명할 수 도 있다.
그런데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설교하면서 자녀들에게 말할 수 있는 목사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목사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앞서 언급했던 토론에서 어느 목사는 자기의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즉 목사는 설교 각 부분의 마지막에 항상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과 방식으로 그 부분의 주된 내용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그들을 위한 부문이 나올 줄 알고 그것을 몹시 기다린다. 목사가 한 번은 아이들을 위한 부분을 생략했는데, 그때 아이들이 실망한 표정으로 목사에게 그들을 위한 설명은 어디 있느냐고 불평했다고 한다. 설교의 주된 내용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할 때 또 다른 유익이 있다. 그것은 어른들에게도 되풀이가 되기에 그것을 통해 성경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설교한다면 모든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목사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아이들이 예배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교회의 조용한 분위기를 거룩한 분위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예배의 분위기가 어떤 움직임에 의해 방해받는다고 생각하기에 아이가 예배시간에 좀 움직이는 것에도 못견디는 맘으로 화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가 한 시간 이상 조용히 앉아 있기란 불가능하며 또 꼭 필요한 일도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예배시간에 있는 조그만 소란과 움직임은 교회의 생명을 상징힌다. 어린이가 없는 교회에 움직임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조금 시끄럽더라도 어린이가 있는 교회는 그 앞날이 밝다. 학교의 임무 아이가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도울 수 있는 일을 무엇일까? 아까 말한대로 화란에는 대부분의 도시에 개혁주의 국민학교가 있으며 시골의 아이들은 버스를 타고서라도 그 학교에 가는 형편이다. 그런 학교의 시간표 가운데는 주간의 찬송이란 것이 꼭 들어 있다. 이 시간을 통해 매주 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편이나 다른 노래의 한 절을 배운다.
앞서의 신문에서는 목사와 학교선생이 여기에 협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학교선생은 주간에 아이들이 배운 시편을 목사에게 이야기하고 목사는 바로 그 시편을 예배시간에 함께 부르도록 한다. 그때 참여한 아이들은 매우 기뻐하며 그 찬송을 신나게 부른다. 아이들이 변성되지 않은 맑은 소리로 찬송을 부를 때 찬송은 정말 깊이가 있고 즐거운 것이 된다. 화란의 개혁주의 국민학교에서는 성경이야기도 가르친다. 또 학교 교과과정에서는 3학년부터 "성경에 기록된 역사"라는 과목이 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 왕,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을 배운다. 이 시간을 통해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깨달았을 뿐 아니라 성경에 무슨 책들이 있는가를 익힌다.
이 모든 교육으로 인해 아이들은 설교를 더 잘 이해하고 예배도 더 잘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부모의 임무 부모의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양육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 일은 말로 할 수 있고 행동으로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주일을 자녀에게 즐거운 날로 만들어 주기 위해 애를 쓴다고 이야기했다.
자녀의 주일 아침 식사에는 특별히 맛있는 것을 준비한다고 하는데 그럼으로써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주일날이 특별한 날 임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자주 자녀들은 '오늘이 주일인데 어떤 맛있는 것을 먹을 겁니까?'라고 질문한다. 그때 부모는 '그렇지 우리는 교회에 가기 때문이란다'라고 대답한다. 이처럼 자녀들은 교회에 나가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고 느낀다. 물론 부모는 자녀들이 교회에 나가도록 준비해야 한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교회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고 말만 해서는 안된다.
그 대신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또 부모는 자녀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가르쳐야 한다. 이처럼 부모는 자녀에게 예배에 대한 의미를 설명해야 한다. 중요한 또 하나는 부모가 예배 후 자녀와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이해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물어 보아야 한다. 특별히 '설교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지만 아이들은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부모는 자녀가 이해할 수 있는 차원에서 설교가 의미하는 것을 설명한다. 또 그들은 설교가 자녀들의 생활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주일날은 부모들에게 자녀의 기독교교육을 위해 특히 바쁜 날이다. 부모의 태도도 매우 중요하다. 부모가 교회에 가는 일에 괸심이 없거나 설교시간에 졸거나 오전예배만 참석하고 오후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자녀에게 예배가 중요하지 않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그런 경우 자녀에게 교회에 열심히 나가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아이들은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열심있는 부모는 자녀들을 열심히 교회에 데리고 나간다. 결과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예배에 참석한 결과는 무엇인가? 그런 것은 소용없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많이 설명해도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많을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한 반론은 '결과는 성령님께 맡기고 부모는 자기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즉 부모는 자녀를 교회에 데리고 가야만 하고 성령님은 그 때 자녀들에게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 예배를 사용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어린이와 예배와 설교의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가지는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교회에 나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 부모는 이처럼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며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함을 그들에게 행동으로 가르친다. 두 번째로 자녀들이 예배와 설교에 대해 우리의 기대보다 많은 것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내가 직접 본 실례를 여기서 언급하겠다. 봉사하던 '레이던(Leiden)교회'에서 고전 15:35이하에 대해 설교했다.
그 설교의 주제는 장례가 기독교인에게는 씨를 뿌리는 것이라는 어려운 내용이었다. 설교 자체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두 주간 후에 장로 한 분이 돌아가셨는 데 너무 뜻밖이어서 교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여덟살이 된 어린 딸이 자기 부모에게 그 설교의 내용을 말하고 그들을 위로했다. 그 아이는 설교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화란의 개혁교회는 자녀와 같이 교회에 가는 일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예배에 아이들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는 교회생활의 표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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