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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의 예배 이해와 장로교 예배 모범의 전통
이승구 교수(합동신학교 조직신학)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특성은 그 교회가 가진 신조와 신학의 개혁 신학적 특성에서와 교회의 모든 실천적 부분에 대한 개혁파적 접근에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배에 대해서도 개혁 신학은 성경에 충실한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본고에서는 먼저 장로교회가 지니고 있는 개혁파적 예배 이해를 제시하고, 이에 근거한 장로교 예배 모범의 전통을 일람해 봄을 통해 우리 한국 장로교회의 예배를 반성하고 우리들의 교회가 참으로 장로교적이고 개혁 교회적 특성을 드러내기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의해 보려고 한다.
1. 예배에 대한 개혁 신학의 이해(개혁 신학적 예배관)
예배란 무엇인가? 엄격하게 말해서 예배는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존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서 그 영혼을 숙여 경배하는(προσκυνέω)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 계시록이 말해주고 있는 우주적 예배의 정황(계 5:13)을 미리 이 땅에서 선취하여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것이다. “최후의 할렐루야 찬양은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 가운데서 이미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 하늘에 천사들과 온전케 된 성도들과 다 함께 모여서 그 천상의 예배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런 우주적 예배에 참여하는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예배하도록 명령하신 것이고,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당위이다. 그러므로 기독교회가 예배를 중요시하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카슨이 잘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성경적 종교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성, 다시 말해서 예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상에서 교회가 그 예배를 주께 드리는 방식을 이해해 온 것은 상당히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비교해 보면 비교적 공식적인 예배의 형태를 강조하던 고전적 예배 유형과 자유로운 형식의 예배를 강조하는 유형이 있다. 그리고 이 두 유형은 시대에 따라서 진자 운동을 하면서 어느 한편으로 치우쳐 가는 방식으로 진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초대 교회의 예배 유형을 정확히 알아내기는 어려우나 대개 회당 예배의 형태와 비슷한 형태의 예배가 드려지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무질서한 형태의 예배가 나타나기도 해서 바울은 모든 것을 질서 있고 단정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특히, 고전 14:40). 그 권면에 따라 예배가 일정한 형식에 따라 드려지다가 그것이 지나치게 형식화하고 의식화하는 경향을 가지자, 다시 자유로운 예배를 강조하는 교회의 자유스러운 예배(free worship)와 극단의 퀘이커적인 예배 형태도 나타났다. 다시 근자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말미암아 예배에 있어서 어떤 형식을 강조하는 추세가 나타나는가 하면, 전통적 예배 형식과 전통적 예배의 개념을 깨고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 등으로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실험하는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예배는 비교적 일정한 형식을 따라 드리는 예배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예배가 일정한 형식을 따라 드려지게 된다는 것은 개혁 교회와 장로교회의 오랜 전통이다.
그러나 이렇게 일정한 형식을 따라 드리는 예배를 강조하는 동방정교회와 천주교회와 루터파와 개혁파의 예배 이해를 비교할 때, 천주교회는 예배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요소들은 모두 사용하며 특히 과거의 전통 가운데서 의미 있게 사용되어 온 것의 계속적인 사용을 지향하여 나가는 데 비해서, 동방정교회와 루터파 교회는 그 가운데서 성경이 명백히 금하고 있는 요소들은(예를 들어서, 상[像, image] 숭배) 제거하고, 성경이 언급하고 있지 않은 요소들에 대해서는 소위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여기면서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을 취하는데 반해서, 개혁 교회에서는 오직 성경이 규정한 것만을 중심으로 하여 주께 예배해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 개혁 교회의 예배 이해의 독특성이 있다. 칼빈은 “명령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단언했던 것이다. 사실 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넘어서 교회가 어떤 새로운 규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거부했다. 사람들과 교회의 “자의적인 주권의 주장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침해이다.” 이런 칼빈의 후예들에게 있어서는 “명령되지 않은 것은 금해진 것이다”는 원칙이 준수되었다. 그러므로 개혁파에서는 예배의 요소들과 예배의 방식을 될 수 있는 대로 성경적 가르침에 근거해서 주께 드리려고 노력해 왔다. 이런 원칙에 따르는 개혁파 선배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첫째로, 개혁 교회는 다른 모든 바른 교회들과 함께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드려질 수 있는 예배는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 영혼을 숙여 경배하는(προσκυνέω) 것이므로, 구속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삶과 십자가의 구속에 의존해서만 하나님께 드려 질 수 있는데, 이는 오직 성령에 의존할 때만 가능한 일이라고 하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이 그들의 구속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서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기독교에서는 지성이면 감천이 아니고, 사람의 의라도 다 떨어진 누더기 같은 것이므로 이것으로 하나님께 감히 나아가 경배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에만 의존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령 안에서 나의 영이 주께 경배해야 한다. 이것이 “영으로”(우리말 개역 성경에 “신령으로”라고 번역된 ἐν πνεύματι) 경배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모든 진정한 예배는 이런 뜻에서 성령 안에서 영이 경배하는 것이다(προσκυνέω). 그러므로 하나님께 경배할 때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공경하여 그 앞에 절을 하겠다는 소원이 있어야 하고, 내가 절하는 그 대상이 받아야 할만큼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반드시 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는 예배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만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구속의 일을 이루시는 크신 하나님으로 바르게 알며 우리의 일생, 몸 전체를 다 드려서 섬겨도 그것으로 부족할 정도로 크시고 엄위하신 하나님으로 바르게 알아야 하며, 그 엄위에 비해 자신은 스스로의 자격으로는 감히 나아갈 수 없는 존재이므로 그리스도의 공로에만 의존하는 대단히 조심스럽고 두려운 심정을 가지고, 그러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해서 담대하게 당당하게 경배하는 심정으로 나아가 섬겨야 한다. 공예배에서는 온 교회가 함께 이런 심정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한다. 바로 이것이 “영 안에서” 경배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영적인 예배”(spiritual worship)는 “성령에 의해서 공인되고, 성령님에 의해서 규제되면 성령님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인 것이다. 이것이 참된 의미에서 영적인 예배, 카리스마틱한 예배이고, 따라서 오순절주의자들이나 신오순절주의자들이 아니라 이런 예배를 드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카리스마틱한 것이다.
둘째로 참된 예배는 “진리 안에서”(ἐν ἀληθείᾳ) 드려져야한다. 개혁파적 예배 이해는 바로 이점에 가장 큰 강조점을 둔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개혁파 선배들이 진리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보증이 있는 예배의 요소들만을 사용하고,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들은 모두 제거하고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려고 한 것이다. “예배의 방식과 요소들에 대해 하나님 말씀의 공인이 있어야만 한다”는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 신학과 교리에서만이 아니라 예배에서도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덧붙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개혁파 선배들은 강조했다. 예를 들어서, 칼빈은 “나는 성경에서 도출된 따라서 전적으로 신적인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한 인간의 제도들만을 시인할 뿐이다”고 말한다(Institutes. IV. x. 30). 그리고 벨직 신앙 고백서(1561)에서는 아주 분명히 천명하기를 교회의 치리자들은 “우리의 유일하신 선생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을 떠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인간적 창안물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사람들이 도입하여 그 어떤 방식으로든지 양심을 얽어매고 강요하는 것들 모든 법들을 거부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1647) 제51문에서는 십계명 제 2계명과 관련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형상으로 써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외에도 “그의 말씀 가운데 정하지 아니한 어떤 다른 방법으로 예배하는 것”이 금해진 것이라고 단언하였던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westminster divines) 예배에 관한 문제를 양심의 자유의 문제로 파악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양심은 그 누구도 규제할 수 없고 오직 양심의 주님(Lord of conscience)이신 하나님께서 내신 법에만 매일 수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지 않으신 것을 행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개혁파 선배들은 특히 신약에 나타나고 있는 규정과 모범을 찾아서 그에 따라 예배하려고 했다. 신약 성경의 나타난 것을 살펴보면 회당 예배에서와 같이 공기도가 있었고(행 2:42; 딤전 2:1, 8; 고전 14:16; 엡 5:20), 성경 봉독이 있었으며(딤전 4:13; 살전 5:27; 살후 3:14; 골 4:15, 16; 벧후 3:15, 16; 계 1:3), 설교로 그 내용을 풀어 주는 일이 있었다(눅 4:20; 딤후 3:15-17; 딤후 4:2). 또한 새언약 백성들의 찬송이 명령되었고, 시사되었으며(엡 5:19; 계 5:9-13; 11:17f.; 15: 3,4), 찬송과 기도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일이 관례화 되었다(고전 14:16; 계 5:14; cf. 롬 1:25; 9:5; 엡 3:21). 가르침은 식탁 교제, 특히 성찬과 연관되어졌고(행 2:42; 20:7, Cf. vv. 20, 25, 28), 이 때의 감사 기도가 언급되었으며(고전 11:24), 세례가 있고 이와 신앙 고백이 연관되어졌다(벧전 3:210 그리하여 공적인 신앙 고백이 시사되고 있다(딤전 6:12; 벧전 3:21; 히 13:15; cf. 고전 15;1-3).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연보가 때때로 함께 나타났고(고전 16:1-3; 고후 9: 11-15; 빌4:18), 백성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후 13:13; 눅 24:50; cf. 민 6:22-27). 그러므로 예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 클라우니의 묘사는 매우 간단히 성경적 예배의 요소와 그 예배적 의미를 잘 요약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 또한 서로 아뢰고, 그의 말씀을 들으며, 기도하고, 찬양하며, 그가 제정하신 성례 가운데서 그의 구원을 송축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면전에 모이는 것이다(행 2:1; 4:23-31; 5:42; 13:2; 고전 11:18-34; 14:23-25; 엡 5:19, 20; 골 3:16; 벧전 3:21).”
이렇게 성경에 나타난 요소들만을 가지고 예배하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는 그들의 정황과 지혜에 따라 적절한 순서를 마련해서 예배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이점은 칼빈이 강조하여 말한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식적인 예배의 순서를 명확히 지시해 주지 않으셨으므로 각 시대와 여러 지역의 교회가 적절히 순서를 만들어 바르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에는 예배의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 포함될 수 없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51문에 대해 설명하면서 윌리암슨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않은 것들이 종교적 가르침과 예배의 영역에 도입될 때마다 제 2계명을 위반하게 된다. 또한 성경에 기초를 두지 않은 예배가 오늘날 얼마나 성행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수많은 개신교 교회들을 방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선배들의 귀한 노력과 피흘려 세운 성경적 전통으로부터의 일탈을 다시 바로 잡기 위해 우리의 장로교 선배들이 예배를 위해 하여 온 노력들을 잠시 점검해 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기독교회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에 대해서도 우리는 주께서 규정하시고 제시해 주신 것을 존중하며 그것에 충실하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예배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와 통제에도 순종해야 한다는 말이다.
2. 과거 개혁파 선배들의 노력들
과거의 개혁파 교회와 장로 교회는 예배에서도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Lordship)에 제대로 반응하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구체적인 노력들을 하여 왔다.
첫째는, 루터파나 쯔빙글리파 사람들과 함께 예배당 안에 특히 예배 때에 상(像)이 사용되는 것을 엄히 금하여 왔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제109문답에서도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삼위나 그 중 어느 한 위의 형상이라도 내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가지든지 외적으로 피조물의 어떤 형상이나 모양으로 만드는 것과 이 형상이나 이 형상 안에서나 이것에 의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 거짓 신들의 형상을 만들고 그들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제 2 계명에서 금하여진 것임을 아주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개혁파 교회와 장로교 전통에서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그 어떤 상과 그림도 허용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화상(icon)을 사용하던 동방 교회에도 동의하지 않는 개혁파의 전통이 여기에 있다.
둘째로, 개혁파 교회와 장로 교회에서는 전통에 근거해서나 우리 자신이 고안해 내서 성경 외의 어떤 요소들을 예배에 도입하는 것을 금하여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납할만한 방식은 주께서 친히 정하셨고 당신님 자신의 계시된 의지로 제한하셔서, 그가 사람들의 상상과 고안에 의해서, 사단의 시사에 의해서, 그 어떤 가시적 표현 아래서, 또는 성경에 규정되지 않은 다른 방법으로 경배를 받지 않게 하셨다(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XXI, 1). 역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제109문답은 다음과 같이 계속 진술한다: “제2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지 않으신 어떤 종교적 예배를 고안하고, 의논하며, 명령하고, 사용하고, 어떤 모양으로라도 인정하는 것들이며, 거짓 종교를 용납하는 것과 ...... 우리 자신들이 발명하든지, 전통을 따라서 사람들로부터 받았든지, 옛 제도, 풍속, 경건, 선한 의도, 혹은 다른 어떤 구실로 예배에 추가하거나 삭감하여 하나님의 예배를 부패하게 하는 시민적 고안들입니다.....” 경건한 동기에서나 선한 의도로 시작된 것이라고 그것이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은 우리의 예배에 도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작성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예배에 향이나 의식적 촛불이 도입되는 것이나 성찬 때에 떡을 무릎을 끓고 받는 일 등을 뜻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선배들이 의식적으로 배제한 모든 비성경적인 요소들을 매우 주의하면서 그것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들의 예배에로 다시 들어오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셋째로, 개혁파 교회와 장로 교회는 회중 찬송을 회복시키고 강조해 왔다. 특히 시편 찬송(the singing of Psalms)은 성경에 대한 강해(설교)와 함께 종교 개혁의 특성이라고도 불린다. 성도들로서는 회중 찬송을 함께 찬양하여 드리는 것이 예배에 참여하는 아주 주요한 한 형태이다. 칼빈은 자신이 친히 시편을 운율에 맞게 번역해서 사용하기도 하였고 당대의 프랑스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던 마로(Clement Marot)의 운율적 번역을 사용하여 찬송케 하기도 했다. 그는 이미 제네바의 1537년 규례(the Article of 1537)에서 “시편들은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 올려 줄 수 있으며, 우리의 찬양으로 그의 이름의 영광을 부르며 높이며 열심 있게 할 수 있다”고 선언한 바 있다. 1539년에 그는 불어 시편 찬송 초판을 발행하였는데, 여기엔 18편의 시편과 3편의 영창(canticles) 실렸고, 이 중 7편은 칼빈이 친히 번역했다고 한다. 이 시편 찬송들이 후에 제네바 시편 찬송(the great Genevan Psalter, 1562)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시편 찬송은 핍박받는 위그노들의 특성이 되었다. 물론 개신 교회는 시편만을 부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후대의 규정적 원리는 시편만을 고집하고 나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지나치게 나간 것은 문제이지만, “시편의 하나님 중심적 경건의 풍성함이 개신교적 헌신을 특징 짖도록 했다”는 말은 참된 것이다. 이 점은 모든 회중이 참여하는 공예배의 공적이며, 공동체적 성격의 한 부분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개혁파 선배들은 예배의 공적이며 공동체적인 성격, 모든 회중이 함께 참여하는 성격을 강조한 것이다.
넷째로, 개혁파 교회와 장로 교회는 공인되고 모든 이가 그에 따라야 하는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보다는 예배 모범(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의 전통을 남겨 주었다. 예배 모범은 강제적인 것이기보다는 예배에 대한 성경적 풍성함에 충실할 수 있는 모델(model)을 제시해 주는 데 있다. 이는 가장 성경에 따르는 예배를 드릴 것을 요구하면서도 예배의 비본질적인 소위 “정황”(circumstance)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일정한 양식을 강제하지 않고, 각 교회와 회중의 자유를 존중하는 전통인 것이다. 장로교회의 예배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바로 예배의 요소들(elements)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성경적 근거를 따져서 그 요소들을 찾고 그에 충실하려고 하면서도 예배의 정황들(circumstances)에서는 자유를 강조하여 어떤 고정적인 의식(liturgy)을 확정짓고 그에 집착하려 하지 않은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개혁파 교회는 결코 어떤 예전적 운동을 벌여 나가지 않았다. 죤 머레이는 “개신 교회들에서 예전적 운동(liturgical movements)이 성행하는 것은 (교회가) 타락한 표식들의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3. 몇 가지 역사적인 예들에 대한 고찰
그러면 이제 장로교회의 풍성한 예배 모범의 전통을 따라서 이제 개혁파적이고 장로교적인 예배 모범 몇 가지를 열거하고 그 장점들만을 중심으로 우리의 예배 모범을 제안해 보기로 하자. 이 목적은 어떤 고정적인 의식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로교 예배 신학의 특성인 자유의 신학에 대립하는 것이다. 단지 풍성한 전통과의 대화 가운데서 가장 성경에 충실한 모범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3-1. 칼빈의 예배 이해와 예배 순서에 대한 칼빈의 제안
칼빈은 (1) 우리의 성도다운 삶과 함께 (2)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sacrifice of thanksgiving)로 이해하면서 이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드리신 속죄의 제사(sacrifice of expiation)에 근거하여 드려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우리의 모든 기도, 찬양, 감사,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은 종국적으로 더 큰 제사(the greater sacrifice)에 의존하니, 이 더 큰제사에 의해서 우리는 영혼과 몸 모두에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성별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외적 행위들이 하나님 섬김에 사용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먼저는 우리 자신이, 그 뒤에는 우리에게 속한 것 모두가 하나님께 성별되고 드려져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섬기는 것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증진하기 위해 열심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Institutes, IV. xviii. 16). 이렇게 칼빈에 의하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에 근거해서 우리의 삶과 예배로 “그들의 존재 전체와 그들의 모든 행위들을 하나님께 갚아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드린다(Institutes, IV. xviii. 13).
예배를 이렇게 이해하는 칼빈은 1541년 제네바로 다시 왔을 때는 스트라스부르그의 부셔(Bucer)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사용된 예배 식순을 채용하여 제네바 예배식을 제안하고 실천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스트라스부르크의 예배 형식을 취하여 그 상당한 부분을 빌어 썼다.” 이는 그가 1542년에 낸 “초대 교회의 관례에 따른 기도 형태와 성례 집례 방식”에 나타나 있는 다음과 같은 순서의 제안에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의 예전(The Liturgy of the Word)
기원(votum or adjutorium: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영광송(Gloria)
죄의 고백
용서에 대한 성경 말씀 낭독과 주의 용서 선언의 말 선언
시편 찬송(운율에 맞춘 시편, 또는 십계명의 앞부분,
각 계명에 대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로 반응함)
거룩송(경우에 따라 생략)
성경 봉독
설교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모금[collection]
중보 기도
[뜻을 풀어 쓴]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회중이 함께 부르는] 사도신경
시편 찬송
아론적 축복기도)
다락방 예전(The Liturgy of the Upper-Room)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모금(collection)
중보 기도
(뜻을 풀어 쓴)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성찬 준비
(회중이 함께 부르는) 사도신경
성찬을 위한 기도
성찬 제정 말씀 봉독
성찬을 위한 권면
성찬에로의 초대
분병, 분잔, 성찬
성찬 이후의 권면
기도, 시므온의 찬미(Dunc Dimittis, 눅 2:29-32)
아론적 축복 기도
그러므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의 부셔(Bucer)를 따르면서 중세에 존재하게 된 요소들과 의식들을 거의 모두 완전하게 버려 버렸지만 “예배 의식의 전통적 형태를 조심스럽게 유지했다”는 하게만의 말에 우리는 상당히 동의할 수 있다.
3-2. 화란 개혁파의 예배 의식
화란의 캄뻔 신학교 실천 신학 교수인 끌라스 루니아(Klaas Runia)는 16세기와 17세기에 화란 개혁파 교회들이 비슷한 예배 의식을 사용하였는데, 그 예배 의식이 어떤 대회나 총회에서 결정되어, “그 어떤 대회나 총회에서도 예배를 위한 온전한 의식(liturgy)을 준비하거나 강요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가장 예배 의식에 대한 언급이 많아 예배 의식적 회의(litergical synod)라고 불리우는 도르트 회의(Synod of Dort, 1574)에서도 교회들에 고정된 순서를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을 루니아는 강조한다. 이 때 결정 사항에 비추어 볼 때 당시의 예배를 다음과 같은 순서로 재구성해 볼 수 있다. 기원(votum), 기도, (시편 찬송), 설교, 기도, 신앙 고백, 축도. 그리고 오후 예배에서는 설교 앞에 십계명 일기가 있었고, 헌금은 예배당 입구의 헌금궤에 드려졌다고 한다.
아마도 이 때까지의 화란 개혁파 교회의 신학과 예배 의식 형성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인물은 영국 런던으로 피나갔다가 프랑크푸르트(Frankfort), 팔라티네이트의 프랑케탈(Frankenthal in the Palatinate) 등지로 옮겨 다니던 화란 피난민 교회의 목회자였던 피터 다떼누스(Peter Dathenus)라고 여겨진다. 팔라티네이트의 예배식은 요하네스 아 라스코(Johannes à Lasco), 칼빈(Calvin), 우르사이너스(Ursinus) 등의 영향을 받은 다음과 같은 순서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기원이 아닌 인사(salutation), (긴 죄의 고백을 포함한) 설교전의 기도, 성경 봉독, 설교, 죄의 고백과 사죄나 풀지 않음의 선언, (감사와 중보의) 긴 기도, 시편, 아론적 축도. 이 바로 이 예배 순서가 소위 베셀 모임(the so-called Convention of Wesel, 1568)과 여러 대회의 의장으로 선임된 바 있는 다떼누스에 의해서 화란 개혁파 교회에 받아들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화란에서의 중요한 시도로 미델부르그 대회(The Synod of Middelburg, 1581)의 결정 중 하나인 별개의 죄용서의 선포는 불필요하다는 선언을 언급할 수 있다. 사제적 의식을 드러내는 선언보다는 죄용서와 사죄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을 이미 포함하고 있는 설교로 충분하다고 여겨진 것이다. 점차 죄의 고백조차도 화란 개혁파 예배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는 목회 기도 안에 이미 삽입되어 있다는 의식이 작용한 듯하다.
16세기말에 이 엄격하고 단순한 예배식이 더 단순화되어 일부 순서, 즉 성경 봉독과 시편 찬송이 예배 이전 순서로 옮겨진 때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교인들이 쓸데없는 잡담을 하므로 혼란케 되지 않도록”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후에 이 예배 전 순서에 십계명 읽기와 사도 신경 고백이 포함되었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이 모든 순서가 다시 본 예배 순서 속을 들어가게 되었다.
도르트 대회(the Great Synod of Dort, 1618-1619)에서는 예배 의식 개정을 위한 위원회를 선정했으나 이 문제를 다룰 충분한 시간을 갖지는 못하고, 아침 예배 때 십계명을 읽도록 하고 오후 예배는 요리 문답 강해 예배로 드리도록 지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문제에 대해서는 최종적 예배 순서를 각 지교회(肢敎會, local church)의 결정에 맡겼다. 여기에 개혁파 예배 신학의 자유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예배하고, 그 요소들만을 사용하되 그 원칙을 가지고 자유롭게 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그들은 예배 의식이 “단순하고 정신차린 것”(simple and sober)이기를 원했다. 대개 이 때의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기원(votum, 시편 124:8), 사도적 인사, 시편송(마리아의 노래, 사가랴의 노래, 시므온의 노래, 주기도문에 곡을 붙인 것, 사도 신경에 곡을 붙인 것 등 11편의 곡), 십계명 봉독(장로들 중 한 분), 통회와 권면의 시편(오후 예배에는 장로 중 한 분이 사도신경 읽음), 성경 봉독(장로님들이 신구약에서), (죄용서와 중보 기도 포함한) 긴 기도[목회 기도], 시편송(부르면서 헌상), 설교(대개 둘째 부분 후에 시편송 부르고 셋째 부분 설교하고 듣기), 적용을 위한 기도, 시편송, 축도.
그런데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화란에서 소위 예전 운동(liturgical movement)이 일어나서 단순한 이전의 예배 의식에 변화를 시도하는 운동이 화란 개혁 교회와 개혁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3-3.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의 제안들(1644)
영국 국교회의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의 대안으로 제시된 이 예배 모법은 따라서 공동 기도서의 의무적인 사용이 이미 정해진 기도문의 낭독(낭독 기도)을 강요하고, 다른 식으로 기도하는 것을 막으며, 설교를 줄이게 하고, 예배를 기계적으로 만드는 등 참된 예배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제안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장로교주의는 예배의 질서와 일정한 순서도 고려할 뿐만 아니라 예배의 자유도 같이 고려했다는 클라우니의 말이 옳은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은 공예배의 요소들을 묘사하고 교회의 공예배를 위한 순서와 진행 방법에 대한 제안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의무적인 강요가 아니라 예배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풍부한 것들을 표현하는 모델로서 제시된 것이다.
Alexander Henderson, Samuel Rutherford, Robert Baillie, George Gillespie 목사, 와 같은 스코틀랜드 신학자들과 Thomas Goodwin, Philip Nye, William Bridge, Anthony Burgess, Edward Reynolds, Richard Vines, Stephen Marshall 그리고 Dr. Temple 등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초안을 작성하고, (11월 27일에 완성되어 의회의 인준을 받은) 혼인과 장례에 대한 모범을 제외하고서는 1644년 11월 22일에 의회(Parliament)의 인준을 받아 공포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http://www.athens.net/~wells/dpwg/ 이 중 순서를 중심으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은 순서를 얻을 수 있다.
말씀의 예전(The Liturgy of the Word)
예배에로의 부름(Call to Worship)
예배를 위한 기원(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며 성령의 임재를 기원)
구약의 말씀(한 장)
운율에 맞춘 시편가
신약의 말씀
운율에 맞춘 시편가
죄 고백과 중보 기도
강설
(구속과 복음과 말씀에 대한 감사의) 기도,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다락방 예전(The Liturgy of the Upper-Room)
성물을 드리는 일
성찬에의 초대
성찬을 위한 감사 기도
성찬 제정의 말씀(고전 11장) 봉독
교훈의 말
봉헌 기도
분병, 분잔
참여와 묵상
성찬에 참여한 자다운 생황을 위한 권면
성찬후의 기도
시편 찬송
축복 기도
이 예배 모범에 대해 논의를 할 때는 웨스트민스터 회의 참석자들 사이의 별로 큰 의견의 차이가 있지 않았다고 하니 당대에는 예배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한 의견의 일치가 있었던 듯하다. 특히 교회 정치 문제에서의 이견들과 오랜 논의와 비교하면 이는 상당히 비슷한 의견들이 당대의 분위기를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안식일의 성화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 그랬었다. 논의가 된 문제로 성경 봉독 할 때 목사 이외의 사람이 읽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목회자가 되기로 준비하는 이들(probationers)이 때때로 봉독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고 한다. 성찬과 세례 문제에 대해서는 오랜 논의가 있었고 특히 성찬을 위한 성도들의 배열의 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있었는데 스코틀랜드의 신학자들은 제안된 견해, 즉 성찬상을 중심으로 앉아 성찬을 나누는 것을 옹호하고, 독립파 사람들이 이에 익숙하지 않은 관계로 성도들이 그들의 회중석에 앉아 관전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결국 성찬상(table) 중심의 배열을 예배 모범은 제안하고 있다.
이런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을 살피면서 클라우니는 장로교 예배를 특징짓는 근본적 확신들로 다음 몇 가지를 제안하고 있는데,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의 전통에 충실하면서 그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첫째로, 다른 모든 측면(즉, 신학의 구조와 삶에 대한 이해)에서도 그러하지만 개혁파에서는 예배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러므로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soli Deo gloria)이라는 어귀로 잘 요약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삶은 예배의 섬김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골 3:17; 엡 5:20; 고전 10:31)”(111). 그러나 삶 전체가 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지만 우리 주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높이는 시간을 가지셨듯이 공예배의 필요성이 있다. 클라우니는 시편 찬송과 주의 날을 예배의 날로 엄수하는 것이 장로교 예배의 송영적 성격을 강화시켜 준다고 지적한다(112).
둘째로, 클라우니는 장로교 예배에서는 성경에 대한 강조가 큰 특징이라고 말한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강조, 특히 성경의 충족성의 강조가 장로교 예배에서 분명히 나나난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경륜 전체 이외에 “성령으로부터 왔다는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나 사람들의 전통으로” 그 무엇도 덧붙여져서는 안 된다(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I, 6). 물론 “종교 개혁 이전에도 뛰어난 설교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에서 새로운 것은 성경의 내용에 대한 체계적인 설교이다”(113). 그러면서 그는 그 예로 칼빈이 거의 성경 전부를 설교한 것을 들고 있다. 개혁파 교회에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고 듣고 설명하여 주는 일이 예배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다(113). 그리고 예배도 성경으로부터 온 요소들만으로 조직하여 드리는 것이다.
셋째로, 클라우니는 성경의 언약 신학을 반영하는 것을 장로교 예배의 특성으로 언급한다(118). 특히 언약의 자녀들과 언약 백성의 연대성을 강조하며 가정 예배와 요리 문답 교육에 대한 강조, 그리고 치리의 중요성과 의미가 언급된다.
넷째로 장로교 예배는 주일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the Christian Sabbath)로 여기는 장로교적 주일 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한다(120).
마지막으로 클라우니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인 자비의 사역(집사직의 사역)에 대한 강조를 장로교 예배의 특성으로 언급한다(120).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를 안식일의 의무로 권고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클라우니의 관찰은 제시된 순서를 그저 교조적으로 반복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의 모범으로서의 성격을 잘 파악하며 그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4. 로버트 레이몬드의 제안
근자에 장로교 신학자가 조직신학 교과서 가운데서 예배 순서의 한 예를 제시한 것을 검토해 보는 것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여겨진다. 근자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근거한 조직신학 책을 낸 로버트 레이몬드는 예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히고 자기 나름의 순서를 제안하였다.
예배에 대해서는 “명령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선택할 자유가 없다”고 하면서 성경에 있는 것을 중심으로 생각하려한 칼빈과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의 전통을 따라서 하나님 자신이 제시하신 방식에 따라 예배할 것을 제시한다(870, 868, 877). 그러나 이것은 예배의 요소들에 관한 것이지, 예배의 때나 장소, 예배의 순서들은 “자연의 빛과 기독교적 사려 분별에 의해, 세상의 일반적인 규칙들에 따라서” 질서 지워져야 한다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I/vi)에 따라 진술한다(870). 그리고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요 4:24)과 관련해서 이는 하나님이 정하시는 방식에 따라 드려야 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871). 그리고 그런 예배는 성경적이고, 영적이고, 단순하며, 장엄하고, 하나님을 존중하는 예배가 될 것이라고 한다(872). 예배의 시간으로서 그는 주께서 부활하신 날로서의 주일 성수를 강조하며 이를 안식일 준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877). 이를 강조하기 위해 그는 챨스 핫지의 다음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지식이 없어지기를 원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주간의 첫날을 거룩히 지키는 것을 무시하도록 하라. 그러나 부활 사건이 어디에서나 알려지고 기억되기를 원한다면 그 날을 부활하신 구주께 대한 예배에로 거룩히 드리도록 해야 한다”(877).
이런 원칙에 따라서 레이몬드는 지난 세대의 부흥회적 예배와 오늘날의 구도자 예배의 아직 신자가 되지 않은 분들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문제점을 지적한다(873). 또한 이런 예배들의 영향을 받아서 전통적인 장로 교회들의 예배도 그 전통을 알 수 없는 예배가 되어 가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우리 하나님은 가슴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으로도 경배되어야 한다; 그에 대한 믿음은 이해를 요구한다”고 강력하게 말한다(873). 그러면서 이를 위해 신학적으로 건전한 회중 찬송과 시편과, 성경적으로 근거한 바르게 해석된 설교,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 그리고 특히 이 시대에 필요한 율법의 제 3의 용에 대한 강조 등이 포함되어야 하며, 광고 등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모든 것들은 다 배제되거나 필요한 광고의 경우에는 예배 전후로 나가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874). 이 모든 것을 반영하면서 레이몬드가 제안하는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875f.):
말씀의 제의(Liturgy of the Word)
말씀을 위한 준비(Preparation for the Word)
(시편 인용이나 찬송을 사용한) 예배에의 부름, Call to Worshi
찬양과 경배의 찬송이나 시편, 또는 찬양과 은혜와 조명을 비는 기도
(회중이 함께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마쳐질 수도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위엄과 우리의 죄인 됨을 깊이 새기게 하는 구약 성경 봉독
죄의 고백과 용서를 비는 기도
(이는 목회자가 대표로 하는 목회 기도일 수도 있고, 기도문에 따라 하는 기도일 수도 있고, 독 기도일 수도 있다)
죄 용서의 확신Assurance of Pardon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찬송 또는 시편
헌상
중보 기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는 신약 성경 봉독
말씀의 선포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준비하도록 하는 찬송
조명을 위한 목회 기도
설교 본문이 되는 성경 봉독
설교
적용을 위한 기도
하나님 말씀의 선포에 반응하는 찬송이나 시편
축도(만일 성찬 예식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다락방의 전례(성찬 전례) (Liturgy of the Upper Room)
(반응의 찬송)
참된 신자들에 대한 주의 상에로의 초대와 불신자들을 금함
예배 송 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찬송
사도 신경 고백
성찬 제정의 말씀 낭독
성별을 위한 기도
떡의 분배
잔의 분배
감사 기도
찬양의 찬송이나 시편
축도
4. 성경의 가르침과 서구 교회의 전례에 근거한 한국 장로교회를 위한 예배 모범
이제 성경의 가르침과 과거 개혁파 교회의 예배 모범을 반영하면서 한국에서 신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은 김홍전 박사에 의해서 제안된 예배의 순서에 근거해서 한국 장로교회적인 예배 모범을 제시해 보기로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마음을 모아 반주자가 주께 대표로 찬양을 올리고 모든 성도는 그 찬양을 속으로 따라 같이 마음을 모아 드리고(전주, prelude) 그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는 데 바로 성경에 있는 기도인 시편을 낭송하여 함께 기도하고, 가장 모범적인 기도인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드린 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기리는 찬송을 드리고(gloria), 시편을 교독한 후 (우리의 믿는 바로 사도 신조로 하나님과 온 세상 앞에 공표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리는 찬송을 드리고(sanctus), 목회자가 목회 기도를 하여 온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진전해 나기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근거해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는 경배 송을 드리고(worship),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성경 봉독과 듣기) 헌상(獻上) 예식을 하여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자신들을 다 주께 드려 주께서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용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공로에 싸서 주님께 드리는 헌상 찬송(offertorium)과 헌상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다른 지체들과 함께 받고, 간절한 마음으로 적용을 위한 기도를 하고,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는 송영(doxology)을 드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반주자가 우리를 대표해서 드리는 후주와 함께 우리도 하나님을 속으로 찬양하면서 우리의 영혼이 다른 지체들과 함께 하나님께 절하는 예배 의식을 마치게 된다.
이런 예배에 있어서 어떤 요소는 모두가 같이 주께 드리고(찬송들, 헌상), 어떤 요소는 인도자가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주께 드리는 바(전주, 후주, 목회 기도, 때로는 기도송, 찬양) 이때 모든 성도들은 그 인도자의 인도를 따라서 속으로 조용히 같이 그 찬송과 기도를 드려야만 한다. 특히 목회자가 공기도를 인도할 때 모든 성도들은 조용히 함께 속으로 그 기도의 내용을 따라서 같이 기도 드리고, 마쳐지면 다 같이 조화롭게 “아멘”으로 응답하여야 한다.
이상은 주로 성례가 함께 있지 않은 경우를 중심으로 언급하였으나 정상적인 예배는 항상 성찬이 함께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성찬이 어떻게 집례되어야 하는 지는 다른 기회에 논의하기로 하자). 여기서는 단지 (1) 칼빈이 강조한 바와 같이 성찬이 자주 집례되어야 한다는 것과 이 때 자기 자신을 살피는 자아 성찰(self-examination)이 의미 있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과 성찬식 자체에서는 (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피흘려 주심에 모든 성도들이 공동체적으로 참여하는 것(communion)이라는 의미가 잘 드러나도록 하는 예식이 되어야 한다는 점, (3) 이를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한 떡에 참여하며 한 잔이 참여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한 떡으로부터 나누어 먹고, 떡을 떼는 일이 예배 중에 일부라도 있어야 하며, 한 잔에 참여함을 보이는 붓는 일이 예배 중에 일부분이라도 있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4) 성령에 의존해서만 의미가 있고 유효하다는 점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5. 결론: 성경의 가르침과 장로교 예배 모범을 돌아보면서
우리들의 예배에서 고쳐져야 할 문제들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제까지 우리는 성경에 근거해서 또한 성경에 근거해 자신들의 예배 지침을 발견하고 그것을 예배의 전 과정에 적용해 보려고 했던 과거 개혁파 선배들의 노력을 돌아보면서 우리 나름의 장로교적 예배 모범을 제안하였다. 이를 마치면서 우리들의 예배에서 고쳐지고 앙양되어야할 몇 가지 사항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의 공로와 십자가와 부활에 의존한 성령님 안에서의 예배라는 점이 확실히 인식되어야 한다. 따라서 예배를 예배하는 자에게 어떤 공로가 되는 것으로 여기면서 이에 근거해서 벌을 피하거나 복을 얻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고, 예배는 마땅히 드려야 하는 당위이며, 오히려 예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은혜로 되어 지는 일임이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이 점에 근거해서 우리는 많은 개혁 신학자들과 함께 지난 세대의 부흥회적 예배와 오늘날의 구도자 예배의 아직 신자가 되지 않은 분들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문제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2) 성경으로부터만 예배의 요소들을 이끌어 내어 예배하려는 진리 안에서의 예배, 이와 함께 성경의 충족성에 대한 분명한 천명, 즉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전 경륜 이외에 그 어떤 것도 계시도 언급하거나 덧붙이지 않으려는 태도가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끌라스 루니아 교수가 잘 말한 것과 같이 “신약 신자들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그들의 주님을 경배해야만 하는 영적인 성인(成人)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여러 교회들이 성경적 근거를 확인하기 어려운 요소들인 “춤이나 상징적 제의들을 예배에 도입하는 것은 예배의 정황을 넘어 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예배에 공연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은 “강단을 무대로, 선포를 여흥으로 대체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일에 우리의 목소리를 더해야 할 것이다.
(3) 온 교회가 같이 드린다는 공동체 예배, 공 예배 의식의 함양(이와 함께 스트라스부르크의 부셔(Bucer)와 칼빈이 강조했던 공동체적 성격의 강조). 함께 모여야 공예배가 드려질 수 있다. 그러므로 모이기를 페하는 어떤 이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히 10:24-25).
(4) 공예배와 공기도시에 방언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성경의 분명한 말씀(고전 14:6-11, 19)에 유의하는 일이 필요하다.
(5) 공예배 중에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연속적으로 읽고 듣는 순서의 회복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성경으로부터 예배를 찾고, 성경을 배우며, 성경 전체를 중심으로 모이는 예배에서는 굳이 소위 교회력에 따른 예배를 따르기보다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워 나가며 그 내용을 따라 예배하는 방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에 그로부터 배운 부셔(Bucer)가 전통적인 lectionary 대신 계속적 성경 읽기(lectio continua)와 그것에 근거한 설교를 도입한 것을 유념해야 한다. 칼빈도 이에 따라서 연속적인 강해를 하여 간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온전히 성경 따르려 하던 이들은 심지어 성탄절도 굳이 지킬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현대에 와서 개신교에서도 나타나고 강조되고 있는 교회력에 따른 예배에의 강조는 어떤 면에서 과거 개혁파 선배들의 가르침에 깊이 유의하지 않은 것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해 나가면 그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에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6) 그 곡조와 가사가 예배에 적합한 찬송을 선곡하고, 작곡하여 찬송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예배에 적절하지 않은 곡과 가사들이 포함된 찬송을 하려 하거나 찬송을 찬송의 본래적 목적 이외의 것으로 전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배격되어야 할 것이다.
(7) 가난한 자를 위한 모금과 구속받은 존재 전체와 날마다의 삶을 주께 드리는 것으로서의 헌상의 의미를 회복하고 잘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다. 헌금은 절대로 축복을 위한 수단으로 드려지는 것으로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구속된 백성이 자신을 전적으로 주님과 주의 일에 드리는 의미로 헌상이 이해되고 수행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바른 정신의 헌상송과 헌상 기도가 드려질 것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8) 예배가 지나치게 의식화되는 일(ritualization)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고치려고 하는 일. 장로교회와 개혁 교회의 개혁파적인 예배는 단순한 예배이다. “예배의 개혁파적인 단순성은 빈곤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이며, 신학적이며, 더 정확하게는 구속사적인 원리이다!”
(9)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중심으로 한 예배 순서 중에 성도의 교제의 요소를 넣는 일을 지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와 이를 돕기 위한 광고 등은 예배 후로 미루는 것이 좋을 것이다. 특히 “사무상 필요로 광고를 한다면 그것은 예배가 끝난 다음에 하는 것이 상례(常例)”라는 말을 유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0) 예배와 삶의 관계의 정립이 필요하다. 예배한 사람들은 예배한 자답게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배와 삶이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그 둘은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그 둘이 분리되면 제의도 무의미해 지기 때문이다. “회중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모이지만, 그것은 이제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데에로 이끌려져야 한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예배이기 때문이다(즉, 예배가 예배를 이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찬양만 하지 말고, 그를 뒤따라가는 삶도 살아야 한다(Kierkegaard). 삶과 분리된 제의를 꾸짖으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호령은(특히 사 1:10-15을 보라)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루니아 교수와 함께 다음 질문을 하게 된다: “주일에 드리는 예배가 그 회중들 각자로 하여금 세상에서 적극적이고 활동적이게 하며, 하나님과 폭넓은 사회 전반의 동료 인간들을 섬기게끔 하는가?”
이승구 교수(합동신학교 조직신학)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특성은 그 교회가 가진 신조와 신학의 개혁 신학적 특성에서와 교회의 모든 실천적 부분에 대한 개혁파적 접근에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배에 대해서도 개혁 신학은 성경에 충실한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본고에서는 먼저 장로교회가 지니고 있는 개혁파적 예배 이해를 제시하고, 이에 근거한 장로교 예배 모범의 전통을 일람해 봄을 통해 우리 한국 장로교회의 예배를 반성하고 우리들의 교회가 참으로 장로교적이고 개혁 교회적 특성을 드러내기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의해 보려고 한다.
1. 예배에 대한 개혁 신학의 이해(개혁 신학적 예배관)
예배란 무엇인가? 엄격하게 말해서 예배는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존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서 그 영혼을 숙여 경배하는(προσκυνέω)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 계시록이 말해주고 있는 우주적 예배의 정황(계 5:13)을 미리 이 땅에서 선취하여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것이다. “최후의 할렐루야 찬양은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 가운데서 이미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 하늘에 천사들과 온전케 된 성도들과 다 함께 모여서 그 천상의 예배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런 우주적 예배에 참여하는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예배하도록 명령하신 것이고,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당위이다. 그러므로 기독교회가 예배를 중요시하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카슨이 잘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성경적 종교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성, 다시 말해서 예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상에서 교회가 그 예배를 주께 드리는 방식을 이해해 온 것은 상당히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비교해 보면 비교적 공식적인 예배의 형태를 강조하던 고전적 예배 유형과 자유로운 형식의 예배를 강조하는 유형이 있다. 그리고 이 두 유형은 시대에 따라서 진자 운동을 하면서 어느 한편으로 치우쳐 가는 방식으로 진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초대 교회의 예배 유형을 정확히 알아내기는 어려우나 대개 회당 예배의 형태와 비슷한 형태의 예배가 드려지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무질서한 형태의 예배가 나타나기도 해서 바울은 모든 것을 질서 있고 단정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특히, 고전 14:40). 그 권면에 따라 예배가 일정한 형식에 따라 드려지다가 그것이 지나치게 형식화하고 의식화하는 경향을 가지자, 다시 자유로운 예배를 강조하는 교회의 자유스러운 예배(free worship)와 극단의 퀘이커적인 예배 형태도 나타났다. 다시 근자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말미암아 예배에 있어서 어떤 형식을 강조하는 추세가 나타나는가 하면, 전통적 예배 형식과 전통적 예배의 개념을 깨고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 등으로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실험하는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예배는 비교적 일정한 형식을 따라 드리는 예배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예배가 일정한 형식을 따라 드려지게 된다는 것은 개혁 교회와 장로교회의 오랜 전통이다.
그러나 이렇게 일정한 형식을 따라 드리는 예배를 강조하는 동방정교회와 천주교회와 루터파와 개혁파의 예배 이해를 비교할 때, 천주교회는 예배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요소들은 모두 사용하며 특히 과거의 전통 가운데서 의미 있게 사용되어 온 것의 계속적인 사용을 지향하여 나가는 데 비해서, 동방정교회와 루터파 교회는 그 가운데서 성경이 명백히 금하고 있는 요소들은(예를 들어서, 상[像, image] 숭배) 제거하고, 성경이 언급하고 있지 않은 요소들에 대해서는 소위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여기면서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을 취하는데 반해서, 개혁 교회에서는 오직 성경이 규정한 것만을 중심으로 하여 주께 예배해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 개혁 교회의 예배 이해의 독특성이 있다. 칼빈은 “명령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단언했던 것이다. 사실 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넘어서 교회가 어떤 새로운 규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거부했다. 사람들과 교회의 “자의적인 주권의 주장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침해이다.” 이런 칼빈의 후예들에게 있어서는 “명령되지 않은 것은 금해진 것이다”는 원칙이 준수되었다. 그러므로 개혁파에서는 예배의 요소들과 예배의 방식을 될 수 있는 대로 성경적 가르침에 근거해서 주께 드리려고 노력해 왔다. 이런 원칙에 따르는 개혁파 선배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첫째로, 개혁 교회는 다른 모든 바른 교회들과 함께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드려질 수 있는 예배는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 영혼을 숙여 경배하는(προσκυνέω) 것이므로, 구속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삶과 십자가의 구속에 의존해서만 하나님께 드려 질 수 있는데, 이는 오직 성령에 의존할 때만 가능한 일이라고 하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이 그들의 구속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서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기독교에서는 지성이면 감천이 아니고, 사람의 의라도 다 떨어진 누더기 같은 것이므로 이것으로 하나님께 감히 나아가 경배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에만 의존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령 안에서 나의 영이 주께 경배해야 한다. 이것이 “영으로”(우리말 개역 성경에 “신령으로”라고 번역된 ἐν πνεύματι) 경배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모든 진정한 예배는 이런 뜻에서 성령 안에서 영이 경배하는 것이다(προσκυνέω). 그러므로 하나님께 경배할 때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공경하여 그 앞에 절을 하겠다는 소원이 있어야 하고, 내가 절하는 그 대상이 받아야 할만큼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반드시 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는 예배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만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구속의 일을 이루시는 크신 하나님으로 바르게 알며 우리의 일생, 몸 전체를 다 드려서 섬겨도 그것으로 부족할 정도로 크시고 엄위하신 하나님으로 바르게 알아야 하며, 그 엄위에 비해 자신은 스스로의 자격으로는 감히 나아갈 수 없는 존재이므로 그리스도의 공로에만 의존하는 대단히 조심스럽고 두려운 심정을 가지고, 그러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해서 담대하게 당당하게 경배하는 심정으로 나아가 섬겨야 한다. 공예배에서는 온 교회가 함께 이런 심정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한다. 바로 이것이 “영 안에서” 경배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영적인 예배”(spiritual worship)는 “성령에 의해서 공인되고, 성령님에 의해서 규제되면 성령님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인 것이다. 이것이 참된 의미에서 영적인 예배, 카리스마틱한 예배이고, 따라서 오순절주의자들이나 신오순절주의자들이 아니라 이런 예배를 드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카리스마틱한 것이다.
둘째로 참된 예배는 “진리 안에서”(ἐν ἀληθείᾳ) 드려져야한다. 개혁파적 예배 이해는 바로 이점에 가장 큰 강조점을 둔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개혁파 선배들이 진리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보증이 있는 예배의 요소들만을 사용하고,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들은 모두 제거하고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려고 한 것이다. “예배의 방식과 요소들에 대해 하나님 말씀의 공인이 있어야만 한다”는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 신학과 교리에서만이 아니라 예배에서도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덧붙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개혁파 선배들은 강조했다. 예를 들어서, 칼빈은 “나는 성경에서 도출된 따라서 전적으로 신적인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한 인간의 제도들만을 시인할 뿐이다”고 말한다(Institutes. IV. x. 30). 그리고 벨직 신앙 고백서(1561)에서는 아주 분명히 천명하기를 교회의 치리자들은 “우리의 유일하신 선생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을 떠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인간적 창안물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사람들이 도입하여 그 어떤 방식으로든지 양심을 얽어매고 강요하는 것들 모든 법들을 거부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1647) 제51문에서는 십계명 제 2계명과 관련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형상으로 써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외에도 “그의 말씀 가운데 정하지 아니한 어떤 다른 방법으로 예배하는 것”이 금해진 것이라고 단언하였던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westminster divines) 예배에 관한 문제를 양심의 자유의 문제로 파악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양심은 그 누구도 규제할 수 없고 오직 양심의 주님(Lord of conscience)이신 하나님께서 내신 법에만 매일 수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지 않으신 것을 행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개혁파 선배들은 특히 신약에 나타나고 있는 규정과 모범을 찾아서 그에 따라 예배하려고 했다. 신약 성경의 나타난 것을 살펴보면 회당 예배에서와 같이 공기도가 있었고(행 2:42; 딤전 2:1, 8; 고전 14:16; 엡 5:20), 성경 봉독이 있었으며(딤전 4:13; 살전 5:27; 살후 3:14; 골 4:15, 16; 벧후 3:15, 16; 계 1:3), 설교로 그 내용을 풀어 주는 일이 있었다(눅 4:20; 딤후 3:15-17; 딤후 4:2). 또한 새언약 백성들의 찬송이 명령되었고, 시사되었으며(엡 5:19; 계 5:9-13; 11:17f.; 15: 3,4), 찬송과 기도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일이 관례화 되었다(고전 14:16; 계 5:14; cf. 롬 1:25; 9:5; 엡 3:21). 가르침은 식탁 교제, 특히 성찬과 연관되어졌고(행 2:42; 20:7, Cf. vv. 20, 25, 28), 이 때의 감사 기도가 언급되었으며(고전 11:24), 세례가 있고 이와 신앙 고백이 연관되어졌다(벧전 3:210 그리하여 공적인 신앙 고백이 시사되고 있다(딤전 6:12; 벧전 3:21; 히 13:15; cf. 고전 15;1-3).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연보가 때때로 함께 나타났고(고전 16:1-3; 고후 9: 11-15; 빌4:18), 백성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후 13:13; 눅 24:50; cf. 민 6:22-27). 그러므로 예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 클라우니의 묘사는 매우 간단히 성경적 예배의 요소와 그 예배적 의미를 잘 요약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 또한 서로 아뢰고, 그의 말씀을 들으며, 기도하고, 찬양하며, 그가 제정하신 성례 가운데서 그의 구원을 송축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면전에 모이는 것이다(행 2:1; 4:23-31; 5:42; 13:2; 고전 11:18-34; 14:23-25; 엡 5:19, 20; 골 3:16; 벧전 3:21).”
이렇게 성경에 나타난 요소들만을 가지고 예배하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는 그들의 정황과 지혜에 따라 적절한 순서를 마련해서 예배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이점은 칼빈이 강조하여 말한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식적인 예배의 순서를 명확히 지시해 주지 않으셨으므로 각 시대와 여러 지역의 교회가 적절히 순서를 만들어 바르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에는 예배의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 포함될 수 없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51문에 대해 설명하면서 윌리암슨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않은 것들이 종교적 가르침과 예배의 영역에 도입될 때마다 제 2계명을 위반하게 된다. 또한 성경에 기초를 두지 않은 예배가 오늘날 얼마나 성행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수많은 개신교 교회들을 방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선배들의 귀한 노력과 피흘려 세운 성경적 전통으로부터의 일탈을 다시 바로 잡기 위해 우리의 장로교 선배들이 예배를 위해 하여 온 노력들을 잠시 점검해 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기독교회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에 대해서도 우리는 주께서 규정하시고 제시해 주신 것을 존중하며 그것에 충실하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예배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와 통제에도 순종해야 한다는 말이다.
2. 과거 개혁파 선배들의 노력들
과거의 개혁파 교회와 장로 교회는 예배에서도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Lordship)에 제대로 반응하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구체적인 노력들을 하여 왔다.
첫째는, 루터파나 쯔빙글리파 사람들과 함께 예배당 안에 특히 예배 때에 상(像)이 사용되는 것을 엄히 금하여 왔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제109문답에서도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삼위나 그 중 어느 한 위의 형상이라도 내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가지든지 외적으로 피조물의 어떤 형상이나 모양으로 만드는 것과 이 형상이나 이 형상 안에서나 이것에 의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 거짓 신들의 형상을 만들고 그들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제 2 계명에서 금하여진 것임을 아주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개혁파 교회와 장로교 전통에서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그 어떤 상과 그림도 허용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화상(icon)을 사용하던 동방 교회에도 동의하지 않는 개혁파의 전통이 여기에 있다.
둘째로, 개혁파 교회와 장로 교회에서는 전통에 근거해서나 우리 자신이 고안해 내서 성경 외의 어떤 요소들을 예배에 도입하는 것을 금하여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납할만한 방식은 주께서 친히 정하셨고 당신님 자신의 계시된 의지로 제한하셔서, 그가 사람들의 상상과 고안에 의해서, 사단의 시사에 의해서, 그 어떤 가시적 표현 아래서, 또는 성경에 규정되지 않은 다른 방법으로 경배를 받지 않게 하셨다(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XXI, 1). 역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제109문답은 다음과 같이 계속 진술한다: “제2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지 않으신 어떤 종교적 예배를 고안하고, 의논하며, 명령하고, 사용하고, 어떤 모양으로라도 인정하는 것들이며, 거짓 종교를 용납하는 것과 ...... 우리 자신들이 발명하든지, 전통을 따라서 사람들로부터 받았든지, 옛 제도, 풍속, 경건, 선한 의도, 혹은 다른 어떤 구실로 예배에 추가하거나 삭감하여 하나님의 예배를 부패하게 하는 시민적 고안들입니다.....” 경건한 동기에서나 선한 의도로 시작된 것이라고 그것이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은 우리의 예배에 도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작성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예배에 향이나 의식적 촛불이 도입되는 것이나 성찬 때에 떡을 무릎을 끓고 받는 일 등을 뜻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선배들이 의식적으로 배제한 모든 비성경적인 요소들을 매우 주의하면서 그것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들의 예배에로 다시 들어오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셋째로, 개혁파 교회와 장로 교회는 회중 찬송을 회복시키고 강조해 왔다. 특히 시편 찬송(the singing of Psalms)은 성경에 대한 강해(설교)와 함께 종교 개혁의 특성이라고도 불린다. 성도들로서는 회중 찬송을 함께 찬양하여 드리는 것이 예배에 참여하는 아주 주요한 한 형태이다. 칼빈은 자신이 친히 시편을 운율에 맞게 번역해서 사용하기도 하였고 당대의 프랑스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던 마로(Clement Marot)의 운율적 번역을 사용하여 찬송케 하기도 했다. 그는 이미 제네바의 1537년 규례(the Article of 1537)에서 “시편들은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 올려 줄 수 있으며, 우리의 찬양으로 그의 이름의 영광을 부르며 높이며 열심 있게 할 수 있다”고 선언한 바 있다. 1539년에 그는 불어 시편 찬송 초판을 발행하였는데, 여기엔 18편의 시편과 3편의 영창(canticles) 실렸고, 이 중 7편은 칼빈이 친히 번역했다고 한다. 이 시편 찬송들이 후에 제네바 시편 찬송(the great Genevan Psalter, 1562)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시편 찬송은 핍박받는 위그노들의 특성이 되었다. 물론 개신 교회는 시편만을 부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후대의 규정적 원리는 시편만을 고집하고 나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지나치게 나간 것은 문제이지만, “시편의 하나님 중심적 경건의 풍성함이 개신교적 헌신을 특징 짖도록 했다”는 말은 참된 것이다. 이 점은 모든 회중이 참여하는 공예배의 공적이며, 공동체적 성격의 한 부분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개혁파 선배들은 예배의 공적이며 공동체적인 성격, 모든 회중이 함께 참여하는 성격을 강조한 것이다.
넷째로, 개혁파 교회와 장로 교회는 공인되고 모든 이가 그에 따라야 하는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보다는 예배 모범(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의 전통을 남겨 주었다. 예배 모범은 강제적인 것이기보다는 예배에 대한 성경적 풍성함에 충실할 수 있는 모델(model)을 제시해 주는 데 있다. 이는 가장 성경에 따르는 예배를 드릴 것을 요구하면서도 예배의 비본질적인 소위 “정황”(circumstance)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일정한 양식을 강제하지 않고, 각 교회와 회중의 자유를 존중하는 전통인 것이다. 장로교회의 예배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바로 예배의 요소들(elements)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성경적 근거를 따져서 그 요소들을 찾고 그에 충실하려고 하면서도 예배의 정황들(circumstances)에서는 자유를 강조하여 어떤 고정적인 의식(liturgy)을 확정짓고 그에 집착하려 하지 않은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개혁파 교회는 결코 어떤 예전적 운동을 벌여 나가지 않았다. 죤 머레이는 “개신 교회들에서 예전적 운동(liturgical movements)이 성행하는 것은 (교회가) 타락한 표식들의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3. 몇 가지 역사적인 예들에 대한 고찰
그러면 이제 장로교회의 풍성한 예배 모범의 전통을 따라서 이제 개혁파적이고 장로교적인 예배 모범 몇 가지를 열거하고 그 장점들만을 중심으로 우리의 예배 모범을 제안해 보기로 하자. 이 목적은 어떤 고정적인 의식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로교 예배 신학의 특성인 자유의 신학에 대립하는 것이다. 단지 풍성한 전통과의 대화 가운데서 가장 성경에 충실한 모범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3-1. 칼빈의 예배 이해와 예배 순서에 대한 칼빈의 제안
칼빈은 (1) 우리의 성도다운 삶과 함께 (2)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sacrifice of thanksgiving)로 이해하면서 이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드리신 속죄의 제사(sacrifice of expiation)에 근거하여 드려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우리의 모든 기도, 찬양, 감사,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은 종국적으로 더 큰 제사(the greater sacrifice)에 의존하니, 이 더 큰제사에 의해서 우리는 영혼과 몸 모두에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성별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외적 행위들이 하나님 섬김에 사용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먼저는 우리 자신이, 그 뒤에는 우리에게 속한 것 모두가 하나님께 성별되고 드려져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섬기는 것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증진하기 위해 열심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Institutes, IV. xviii. 16). 이렇게 칼빈에 의하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에 근거해서 우리의 삶과 예배로 “그들의 존재 전체와 그들의 모든 행위들을 하나님께 갚아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드린다(Institutes, IV. xviii. 13).
예배를 이렇게 이해하는 칼빈은 1541년 제네바로 다시 왔을 때는 스트라스부르그의 부셔(Bucer)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사용된 예배 식순을 채용하여 제네바 예배식을 제안하고 실천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스트라스부르크의 예배 형식을 취하여 그 상당한 부분을 빌어 썼다.” 이는 그가 1542년에 낸 “초대 교회의 관례에 따른 기도 형태와 성례 집례 방식”에 나타나 있는 다음과 같은 순서의 제안에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의 예전(The Liturgy of the Word)
기원(votum or adjutorium: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영광송(Gloria)
죄의 고백
용서에 대한 성경 말씀 낭독과 주의 용서 선언의 말 선언
시편 찬송(운율에 맞춘 시편, 또는 십계명의 앞부분,
각 계명에 대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로 반응함)
거룩송(경우에 따라 생략)
성경 봉독
설교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모금[collection]
중보 기도
[뜻을 풀어 쓴]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회중이 함께 부르는] 사도신경
시편 찬송
아론적 축복기도)
다락방 예전(The Liturgy of the Upper-Room)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모금(collection)
중보 기도
(뜻을 풀어 쓴)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성찬 준비
(회중이 함께 부르는) 사도신경
성찬을 위한 기도
성찬 제정 말씀 봉독
성찬을 위한 권면
성찬에로의 초대
분병, 분잔, 성찬
성찬 이후의 권면
기도, 시므온의 찬미(Dunc Dimittis, 눅 2:29-32)
아론적 축복 기도
그러므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의 부셔(Bucer)를 따르면서 중세에 존재하게 된 요소들과 의식들을 거의 모두 완전하게 버려 버렸지만 “예배 의식의 전통적 형태를 조심스럽게 유지했다”는 하게만의 말에 우리는 상당히 동의할 수 있다.
3-2. 화란 개혁파의 예배 의식
화란의 캄뻔 신학교 실천 신학 교수인 끌라스 루니아(Klaas Runia)는 16세기와 17세기에 화란 개혁파 교회들이 비슷한 예배 의식을 사용하였는데, 그 예배 의식이 어떤 대회나 총회에서 결정되어, “그 어떤 대회나 총회에서도 예배를 위한 온전한 의식(liturgy)을 준비하거나 강요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가장 예배 의식에 대한 언급이 많아 예배 의식적 회의(litergical synod)라고 불리우는 도르트 회의(Synod of Dort, 1574)에서도 교회들에 고정된 순서를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을 루니아는 강조한다. 이 때 결정 사항에 비추어 볼 때 당시의 예배를 다음과 같은 순서로 재구성해 볼 수 있다. 기원(votum), 기도, (시편 찬송), 설교, 기도, 신앙 고백, 축도. 그리고 오후 예배에서는 설교 앞에 십계명 일기가 있었고, 헌금은 예배당 입구의 헌금궤에 드려졌다고 한다.
아마도 이 때까지의 화란 개혁파 교회의 신학과 예배 의식 형성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인물은 영국 런던으로 피나갔다가 프랑크푸르트(Frankfort), 팔라티네이트의 프랑케탈(Frankenthal in the Palatinate) 등지로 옮겨 다니던 화란 피난민 교회의 목회자였던 피터 다떼누스(Peter Dathenus)라고 여겨진다. 팔라티네이트의 예배식은 요하네스 아 라스코(Johannes à Lasco), 칼빈(Calvin), 우르사이너스(Ursinus) 등의 영향을 받은 다음과 같은 순서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기원이 아닌 인사(salutation), (긴 죄의 고백을 포함한) 설교전의 기도, 성경 봉독, 설교, 죄의 고백과 사죄나 풀지 않음의 선언, (감사와 중보의) 긴 기도, 시편, 아론적 축도. 이 바로 이 예배 순서가 소위 베셀 모임(the so-called Convention of Wesel, 1568)과 여러 대회의 의장으로 선임된 바 있는 다떼누스에 의해서 화란 개혁파 교회에 받아들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화란에서의 중요한 시도로 미델부르그 대회(The Synod of Middelburg, 1581)의 결정 중 하나인 별개의 죄용서의 선포는 불필요하다는 선언을 언급할 수 있다. 사제적 의식을 드러내는 선언보다는 죄용서와 사죄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을 이미 포함하고 있는 설교로 충분하다고 여겨진 것이다. 점차 죄의 고백조차도 화란 개혁파 예배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는 목회 기도 안에 이미 삽입되어 있다는 의식이 작용한 듯하다.
16세기말에 이 엄격하고 단순한 예배식이 더 단순화되어 일부 순서, 즉 성경 봉독과 시편 찬송이 예배 이전 순서로 옮겨진 때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교인들이 쓸데없는 잡담을 하므로 혼란케 되지 않도록”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후에 이 예배 전 순서에 십계명 읽기와 사도 신경 고백이 포함되었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이 모든 순서가 다시 본 예배 순서 속을 들어가게 되었다.
도르트 대회(the Great Synod of Dort, 1618-1619)에서는 예배 의식 개정을 위한 위원회를 선정했으나 이 문제를 다룰 충분한 시간을 갖지는 못하고, 아침 예배 때 십계명을 읽도록 하고 오후 예배는 요리 문답 강해 예배로 드리도록 지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문제에 대해서는 최종적 예배 순서를 각 지교회(肢敎會, local church)의 결정에 맡겼다. 여기에 개혁파 예배 신학의 자유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예배하고, 그 요소들만을 사용하되 그 원칙을 가지고 자유롭게 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그들은 예배 의식이 “단순하고 정신차린 것”(simple and sober)이기를 원했다. 대개 이 때의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기원(votum, 시편 124:8), 사도적 인사, 시편송(마리아의 노래, 사가랴의 노래, 시므온의 노래, 주기도문에 곡을 붙인 것, 사도 신경에 곡을 붙인 것 등 11편의 곡), 십계명 봉독(장로들 중 한 분), 통회와 권면의 시편(오후 예배에는 장로 중 한 분이 사도신경 읽음), 성경 봉독(장로님들이 신구약에서), (죄용서와 중보 기도 포함한) 긴 기도[목회 기도], 시편송(부르면서 헌상), 설교(대개 둘째 부분 후에 시편송 부르고 셋째 부분 설교하고 듣기), 적용을 위한 기도, 시편송, 축도.
그런데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화란에서 소위 예전 운동(liturgical movement)이 일어나서 단순한 이전의 예배 의식에 변화를 시도하는 운동이 화란 개혁 교회와 개혁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3-3.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의 제안들(1644)
영국 국교회의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의 대안으로 제시된 이 예배 모법은 따라서 공동 기도서의 의무적인 사용이 이미 정해진 기도문의 낭독(낭독 기도)을 강요하고, 다른 식으로 기도하는 것을 막으며, 설교를 줄이게 하고, 예배를 기계적으로 만드는 등 참된 예배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제안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장로교주의는 예배의 질서와 일정한 순서도 고려할 뿐만 아니라 예배의 자유도 같이 고려했다는 클라우니의 말이 옳은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은 공예배의 요소들을 묘사하고 교회의 공예배를 위한 순서와 진행 방법에 대한 제안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의무적인 강요가 아니라 예배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풍부한 것들을 표현하는 모델로서 제시된 것이다.
Alexander Henderson, Samuel Rutherford, Robert Baillie, George Gillespie 목사, 와 같은 스코틀랜드 신학자들과 Thomas Goodwin, Philip Nye, William Bridge, Anthony Burgess, Edward Reynolds, Richard Vines, Stephen Marshall 그리고 Dr. Temple 등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초안을 작성하고, (11월 27일에 완성되어 의회의 인준을 받은) 혼인과 장례에 대한 모범을 제외하고서는 1644년 11월 22일에 의회(Parliament)의 인준을 받아 공포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http://www.athens.net/~wells/dpwg/ 이 중 순서를 중심으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은 순서를 얻을 수 있다.
말씀의 예전(The Liturgy of the Word)
예배에로의 부름(Call to Worship)
예배를 위한 기원(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며 성령의 임재를 기원)
구약의 말씀(한 장)
운율에 맞춘 시편가
신약의 말씀
운율에 맞춘 시편가
죄 고백과 중보 기도
강설
(구속과 복음과 말씀에 대한 감사의) 기도,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다락방 예전(The Liturgy of the Upper-Room)
성물을 드리는 일
성찬에의 초대
성찬을 위한 감사 기도
성찬 제정의 말씀(고전 11장) 봉독
교훈의 말
봉헌 기도
분병, 분잔
참여와 묵상
성찬에 참여한 자다운 생황을 위한 권면
성찬후의 기도
시편 찬송
축복 기도
이 예배 모범에 대해 논의를 할 때는 웨스트민스터 회의 참석자들 사이의 별로 큰 의견의 차이가 있지 않았다고 하니 당대에는 예배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한 의견의 일치가 있었던 듯하다. 특히 교회 정치 문제에서의 이견들과 오랜 논의와 비교하면 이는 상당히 비슷한 의견들이 당대의 분위기를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안식일의 성화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 그랬었다. 논의가 된 문제로 성경 봉독 할 때 목사 이외의 사람이 읽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목회자가 되기로 준비하는 이들(probationers)이 때때로 봉독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고 한다. 성찬과 세례 문제에 대해서는 오랜 논의가 있었고 특히 성찬을 위한 성도들의 배열의 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있었는데 스코틀랜드의 신학자들은 제안된 견해, 즉 성찬상을 중심으로 앉아 성찬을 나누는 것을 옹호하고, 독립파 사람들이 이에 익숙하지 않은 관계로 성도들이 그들의 회중석에 앉아 관전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결국 성찬상(table) 중심의 배열을 예배 모범은 제안하고 있다.
이런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을 살피면서 클라우니는 장로교 예배를 특징짓는 근본적 확신들로 다음 몇 가지를 제안하고 있는데,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의 전통에 충실하면서 그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첫째로, 다른 모든 측면(즉, 신학의 구조와 삶에 대한 이해)에서도 그러하지만 개혁파에서는 예배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러므로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soli Deo gloria)이라는 어귀로 잘 요약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삶은 예배의 섬김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골 3:17; 엡 5:20; 고전 10:31)”(111). 그러나 삶 전체가 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지만 우리 주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높이는 시간을 가지셨듯이 공예배의 필요성이 있다. 클라우니는 시편 찬송과 주의 날을 예배의 날로 엄수하는 것이 장로교 예배의 송영적 성격을 강화시켜 준다고 지적한다(112).
둘째로, 클라우니는 장로교 예배에서는 성경에 대한 강조가 큰 특징이라고 말한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강조, 특히 성경의 충족성의 강조가 장로교 예배에서 분명히 나나난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경륜 전체 이외에 “성령으로부터 왔다는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나 사람들의 전통으로” 그 무엇도 덧붙여져서는 안 된다(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I, 6). 물론 “종교 개혁 이전에도 뛰어난 설교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에서 새로운 것은 성경의 내용에 대한 체계적인 설교이다”(113). 그러면서 그는 그 예로 칼빈이 거의 성경 전부를 설교한 것을 들고 있다. 개혁파 교회에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고 듣고 설명하여 주는 일이 예배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다(113). 그리고 예배도 성경으로부터 온 요소들만으로 조직하여 드리는 것이다.
셋째로, 클라우니는 성경의 언약 신학을 반영하는 것을 장로교 예배의 특성으로 언급한다(118). 특히 언약의 자녀들과 언약 백성의 연대성을 강조하며 가정 예배와 요리 문답 교육에 대한 강조, 그리고 치리의 중요성과 의미가 언급된다.
넷째로 장로교 예배는 주일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the Christian Sabbath)로 여기는 장로교적 주일 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한다(120).
마지막으로 클라우니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인 자비의 사역(집사직의 사역)에 대한 강조를 장로교 예배의 특성으로 언급한다(120).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를 안식일의 의무로 권고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클라우니의 관찰은 제시된 순서를 그저 교조적으로 반복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의 모범으로서의 성격을 잘 파악하며 그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4. 로버트 레이몬드의 제안
근자에 장로교 신학자가 조직신학 교과서 가운데서 예배 순서의 한 예를 제시한 것을 검토해 보는 것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여겨진다. 근자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근거한 조직신학 책을 낸 로버트 레이몬드는 예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히고 자기 나름의 순서를 제안하였다.
예배에 대해서는 “명령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선택할 자유가 없다”고 하면서 성경에 있는 것을 중심으로 생각하려한 칼빈과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의 전통을 따라서 하나님 자신이 제시하신 방식에 따라 예배할 것을 제시한다(870, 868, 877). 그러나 이것은 예배의 요소들에 관한 것이지, 예배의 때나 장소, 예배의 순서들은 “자연의 빛과 기독교적 사려 분별에 의해, 세상의 일반적인 규칙들에 따라서” 질서 지워져야 한다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I/vi)에 따라 진술한다(870). 그리고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요 4:24)과 관련해서 이는 하나님이 정하시는 방식에 따라 드려야 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871). 그리고 그런 예배는 성경적이고, 영적이고, 단순하며, 장엄하고, 하나님을 존중하는 예배가 될 것이라고 한다(872). 예배의 시간으로서 그는 주께서 부활하신 날로서의 주일 성수를 강조하며 이를 안식일 준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877). 이를 강조하기 위해 그는 챨스 핫지의 다음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지식이 없어지기를 원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주간의 첫날을 거룩히 지키는 것을 무시하도록 하라. 그러나 부활 사건이 어디에서나 알려지고 기억되기를 원한다면 그 날을 부활하신 구주께 대한 예배에로 거룩히 드리도록 해야 한다”(877).
이런 원칙에 따라서 레이몬드는 지난 세대의 부흥회적 예배와 오늘날의 구도자 예배의 아직 신자가 되지 않은 분들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문제점을 지적한다(873). 또한 이런 예배들의 영향을 받아서 전통적인 장로 교회들의 예배도 그 전통을 알 수 없는 예배가 되어 가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우리 하나님은 가슴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으로도 경배되어야 한다; 그에 대한 믿음은 이해를 요구한다”고 강력하게 말한다(873). 그러면서 이를 위해 신학적으로 건전한 회중 찬송과 시편과, 성경적으로 근거한 바르게 해석된 설교,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 그리고 특히 이 시대에 필요한 율법의 제 3의 용에 대한 강조 등이 포함되어야 하며, 광고 등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모든 것들은 다 배제되거나 필요한 광고의 경우에는 예배 전후로 나가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874). 이 모든 것을 반영하면서 레이몬드가 제안하는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875f.):
말씀의 제의(Liturgy of the Word)
말씀을 위한 준비(Preparation for the Word)
(시편 인용이나 찬송을 사용한) 예배에의 부름, Call to Worshi
찬양과 경배의 찬송이나 시편, 또는 찬양과 은혜와 조명을 비는 기도
(회중이 함께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마쳐질 수도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위엄과 우리의 죄인 됨을 깊이 새기게 하는 구약 성경 봉독
죄의 고백과 용서를 비는 기도
(이는 목회자가 대표로 하는 목회 기도일 수도 있고, 기도문에 따라 하는 기도일 수도 있고, 독 기도일 수도 있다)
죄 용서의 확신Assurance of Pardon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찬송 또는 시편
헌상
중보 기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는 신약 성경 봉독
말씀의 선포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준비하도록 하는 찬송
조명을 위한 목회 기도
설교 본문이 되는 성경 봉독
설교
적용을 위한 기도
하나님 말씀의 선포에 반응하는 찬송이나 시편
축도(만일 성찬 예식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다락방의 전례(성찬 전례) (Liturgy of the Upper Room)
(반응의 찬송)
참된 신자들에 대한 주의 상에로의 초대와 불신자들을 금함
예배 송 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찬송
사도 신경 고백
성찬 제정의 말씀 낭독
성별을 위한 기도
떡의 분배
잔의 분배
감사 기도
찬양의 찬송이나 시편
축도
4. 성경의 가르침과 서구 교회의 전례에 근거한 한국 장로교회를 위한 예배 모범
이제 성경의 가르침과 과거 개혁파 교회의 예배 모범을 반영하면서 한국에서 신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은 김홍전 박사에 의해서 제안된 예배의 순서에 근거해서 한국 장로교회적인 예배 모범을 제시해 보기로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마음을 모아 반주자가 주께 대표로 찬양을 올리고 모든 성도는 그 찬양을 속으로 따라 같이 마음을 모아 드리고(전주, prelude) 그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는 데 바로 성경에 있는 기도인 시편을 낭송하여 함께 기도하고, 가장 모범적인 기도인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드린 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기리는 찬송을 드리고(gloria), 시편을 교독한 후 (우리의 믿는 바로 사도 신조로 하나님과 온 세상 앞에 공표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리는 찬송을 드리고(sanctus), 목회자가 목회 기도를 하여 온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진전해 나기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근거해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는 경배 송을 드리고(worship),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성경 봉독과 듣기) 헌상(獻上) 예식을 하여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자신들을 다 주께 드려 주께서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용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공로에 싸서 주님께 드리는 헌상 찬송(offertorium)과 헌상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다른 지체들과 함께 받고, 간절한 마음으로 적용을 위한 기도를 하고,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는 송영(doxology)을 드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반주자가 우리를 대표해서 드리는 후주와 함께 우리도 하나님을 속으로 찬양하면서 우리의 영혼이 다른 지체들과 함께 하나님께 절하는 예배 의식을 마치게 된다.
이런 예배에 있어서 어떤 요소는 모두가 같이 주께 드리고(찬송들, 헌상), 어떤 요소는 인도자가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주께 드리는 바(전주, 후주, 목회 기도, 때로는 기도송, 찬양) 이때 모든 성도들은 그 인도자의 인도를 따라서 속으로 조용히 같이 그 찬송과 기도를 드려야만 한다. 특히 목회자가 공기도를 인도할 때 모든 성도들은 조용히 함께 속으로 그 기도의 내용을 따라서 같이 기도 드리고, 마쳐지면 다 같이 조화롭게 “아멘”으로 응답하여야 한다.
이상은 주로 성례가 함께 있지 않은 경우를 중심으로 언급하였으나 정상적인 예배는 항상 성찬이 함께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성찬이 어떻게 집례되어야 하는 지는 다른 기회에 논의하기로 하자). 여기서는 단지 (1) 칼빈이 강조한 바와 같이 성찬이 자주 집례되어야 한다는 것과 이 때 자기 자신을 살피는 자아 성찰(self-examination)이 의미 있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과 성찬식 자체에서는 (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피흘려 주심에 모든 성도들이 공동체적으로 참여하는 것(communion)이라는 의미가 잘 드러나도록 하는 예식이 되어야 한다는 점, (3) 이를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한 떡에 참여하며 한 잔이 참여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한 떡으로부터 나누어 먹고, 떡을 떼는 일이 예배 중에 일부라도 있어야 하며, 한 잔에 참여함을 보이는 붓는 일이 예배 중에 일부분이라도 있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4) 성령에 의존해서만 의미가 있고 유효하다는 점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5. 결론: 성경의 가르침과 장로교 예배 모범을 돌아보면서
우리들의 예배에서 고쳐져야 할 문제들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제까지 우리는 성경에 근거해서 또한 성경에 근거해 자신들의 예배 지침을 발견하고 그것을 예배의 전 과정에 적용해 보려고 했던 과거 개혁파 선배들의 노력을 돌아보면서 우리 나름의 장로교적 예배 모범을 제안하였다. 이를 마치면서 우리들의 예배에서 고쳐지고 앙양되어야할 몇 가지 사항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의 공로와 십자가와 부활에 의존한 성령님 안에서의 예배라는 점이 확실히 인식되어야 한다. 따라서 예배를 예배하는 자에게 어떤 공로가 되는 것으로 여기면서 이에 근거해서 벌을 피하거나 복을 얻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고, 예배는 마땅히 드려야 하는 당위이며, 오히려 예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은혜로 되어 지는 일임이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이 점에 근거해서 우리는 많은 개혁 신학자들과 함께 지난 세대의 부흥회적 예배와 오늘날의 구도자 예배의 아직 신자가 되지 않은 분들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문제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2) 성경으로부터만 예배의 요소들을 이끌어 내어 예배하려는 진리 안에서의 예배, 이와 함께 성경의 충족성에 대한 분명한 천명, 즉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전 경륜 이외에 그 어떤 것도 계시도 언급하거나 덧붙이지 않으려는 태도가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끌라스 루니아 교수가 잘 말한 것과 같이 “신약 신자들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그들의 주님을 경배해야만 하는 영적인 성인(成人)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여러 교회들이 성경적 근거를 확인하기 어려운 요소들인 “춤이나 상징적 제의들을 예배에 도입하는 것은 예배의 정황을 넘어 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예배에 공연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은 “강단을 무대로, 선포를 여흥으로 대체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일에 우리의 목소리를 더해야 할 것이다.
(3) 온 교회가 같이 드린다는 공동체 예배, 공 예배 의식의 함양(이와 함께 스트라스부르크의 부셔(Bucer)와 칼빈이 강조했던 공동체적 성격의 강조). 함께 모여야 공예배가 드려질 수 있다. 그러므로 모이기를 페하는 어떤 이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히 10:24-25).
(4) 공예배와 공기도시에 방언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성경의 분명한 말씀(고전 14:6-11, 19)에 유의하는 일이 필요하다.
(5) 공예배 중에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연속적으로 읽고 듣는 순서의 회복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성경으로부터 예배를 찾고, 성경을 배우며, 성경 전체를 중심으로 모이는 예배에서는 굳이 소위 교회력에 따른 예배를 따르기보다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워 나가며 그 내용을 따라 예배하는 방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에 그로부터 배운 부셔(Bucer)가 전통적인 lectionary 대신 계속적 성경 읽기(lectio continua)와 그것에 근거한 설교를 도입한 것을 유념해야 한다. 칼빈도 이에 따라서 연속적인 강해를 하여 간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온전히 성경 따르려 하던 이들은 심지어 성탄절도 굳이 지킬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현대에 와서 개신교에서도 나타나고 강조되고 있는 교회력에 따른 예배에의 강조는 어떤 면에서 과거 개혁파 선배들의 가르침에 깊이 유의하지 않은 것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해 나가면 그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에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6) 그 곡조와 가사가 예배에 적합한 찬송을 선곡하고, 작곡하여 찬송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예배에 적절하지 않은 곡과 가사들이 포함된 찬송을 하려 하거나 찬송을 찬송의 본래적 목적 이외의 것으로 전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배격되어야 할 것이다.
(7) 가난한 자를 위한 모금과 구속받은 존재 전체와 날마다의 삶을 주께 드리는 것으로서의 헌상의 의미를 회복하고 잘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다. 헌금은 절대로 축복을 위한 수단으로 드려지는 것으로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구속된 백성이 자신을 전적으로 주님과 주의 일에 드리는 의미로 헌상이 이해되고 수행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바른 정신의 헌상송과 헌상 기도가 드려질 것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8) 예배가 지나치게 의식화되는 일(ritualization)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고치려고 하는 일. 장로교회와 개혁 교회의 개혁파적인 예배는 단순한 예배이다. “예배의 개혁파적인 단순성은 빈곤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이며, 신학적이며, 더 정확하게는 구속사적인 원리이다!”
(9)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중심으로 한 예배 순서 중에 성도의 교제의 요소를 넣는 일을 지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와 이를 돕기 위한 광고 등은 예배 후로 미루는 것이 좋을 것이다. 특히 “사무상 필요로 광고를 한다면 그것은 예배가 끝난 다음에 하는 것이 상례(常例)”라는 말을 유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0) 예배와 삶의 관계의 정립이 필요하다. 예배한 사람들은 예배한 자답게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배와 삶이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그 둘은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그 둘이 분리되면 제의도 무의미해 지기 때문이다. “회중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모이지만, 그것은 이제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데에로 이끌려져야 한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예배이기 때문이다(즉, 예배가 예배를 이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찬양만 하지 말고, 그를 뒤따라가는 삶도 살아야 한다(Kierkegaard). 삶과 분리된 제의를 꾸짖으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호령은(특히 사 1:10-15을 보라)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루니아 교수와 함께 다음 질문을 하게 된다: “주일에 드리는 예배가 그 회중들 각자로 하여금 세상에서 적극적이고 활동적이게 하며, 하나님과 폭넓은 사회 전반의 동료 인간들을 섬기게끔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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