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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국제신학지 4호」에 실린 글입니다. 공예배 이해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공예배의 회복
이광호 목사
1. 서론
우리 시대에 들어와 예배에 대한 본질적인 개념이 많이 흐려졌다.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어도 개인적 열정과 정성이 깃든 예배라면 그것이 좋은 예배라 하기도 한다. 예배에 참여하는 자가 감격을 느끼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워 하는 것이다. 나아가 각종 악기를 동원한 ‘행사형’ 예배방식이 유행하여 사람들을 끌기도 한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어 많이 모이기만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예배를 인도하는 많은 목사들은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뜻보다는 회중의 흥미를 유발하려는 노력을 쏟아 붓는다. 그 결과 설교자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선포가 아니라 대중적 감화에 역점을 두게 되어 강단이 허물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 시대에 생겨나기 시작한 대형 교회들에서는 성례의 진정한 의미가 사라졌다. 세례와 성찬의 참된 의미와 나눔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지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서로 알지 못하여 성도들 상호간 믿음의 관계 속에 있지 않다면 참다운 공예배가 드려질 수 없다.
보편교회에 속한 모든 하나님의 참된 교회들은 상호 유기적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개교회 혹은 개체교회라는 의미를 강하게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는 단일한 우주적 교회에 속한 지(支)교회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개체 교회라 했을 때 각 교회는 개체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것 처럼 오해하게 될 여지가 남는다. 그러나 지교회라 했을 때 그 의미는 한 둥치에 붙어 있는 ‘가지’ 교회로서의 보편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성경에는 포도나무 비유, 무화과나무 비유, 감람나무 비유 등 많은 비유들이 나오는데 모든 가지들이 한 나무둥치에 붙어있듯이 보편교회의 의미도 이와 동일한 개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도 개별성도나 지교회는 원리상 자의적 판단을 할 수 없다. 보편교회에 속한 지교회로서 보편적 질서 가운데 이루어지는 공예배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한 주일 가운데 안식 후 첫날을 주일(主日)로 정해 공예배를 드리기 원하신다.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구약의 율법적 언약을 이루어 구속을 완성하신 날이다. 그 날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완성과 택하신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특별히 그 날을 주일로 정해 공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공예배는 보편적 질서와 직분적 기능 속에서 드려져야 한다. 그냥 성도들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며, 그 가운데 설교가 있으면 그것이 공예배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예배 가운데는 마땅히 있어야할 내용들이 있으며 공교회적 질서에 따라 예배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공예배는 개별적 성향에 따라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며, 모든 사적인 예배나 비공적인 예배는 매주일 행해지는 ‘공예배’의 의미 아래서 그 예배의 의미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2. 예배의 의미와 범위
(1) 공예배의 의미
공예배란 무엇인가? 모든 성도들은 매 주일마다 자발적 신앙으로 인한 결과로써 선한 의무감을 가지고 각 지교회로 모여 하나님을 경배한다. 우리가 이해해야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신부로서 전체적인 교회가 구원받은 영혼으로서의 개인 보다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각 개인들이 모여 공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기보다 개별 성도들이 공예배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경배함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공예배는 보편교회 가운데 이루어지는 언약적 예배이다. 이를 한국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대예배’라 칭한다. 주일 날 지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공예배의 요건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공예배이다. 주일 오후나 밤에 모이는 예배는 사실상 성도들을 위한 성경공부나 교육을 위한 시간으로 보면 옳을 것이다. 그 시간에는 성경을 공부할 수 있을 것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대소요리문답,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등을 공부함으로써 성도들을 교육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시간은 결국 온전한 공예배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공예배란 교회가 공적으로 결의한 예배모임이라는 말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공적인 결의를 통해 모이는 모임은 주일 대예배 이외에 주일 오후 혹은 저녁 모임이 있다. 그리고 수요일 밤 모임이 있다. 그리고 교회에 따라서는 금요일 저녁에 모여 기도회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모임은 ‘공예배’라는 의미와는 다른 개념이다. 공예배란 온 성도가 함께 모여 공적인 예배의 내용과 절차 및 형식을 갖춘 예배인 것이다.
신약시대의 주일은 언약적 개념을 가지며, 보편교회는 그 주일에 이루어지는 공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한다. 근래에는 주 5일 근무제로 인해 주일예배를 다른 요일로 변경하려는 일부 교회들의 움직임이 있으나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실 역사 가운데서도 종교개혁자들은 일요일의 우상화를 우려해 주일(主日)을 다른 요일로 바꾸어야 할 만큼 심각한 지적을 한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게된 배경에는 복음을 떠난 비기독교적 영향에 대한 반동적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2) 지교회의 예배참여 범위
공예배에는 지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입교인들은 물론이며, 유아세례교인들 역시 마땅히 참여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경우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이들이 입교를 하기전 까지는 공예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듯 일반화 되어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유아세례 교인을 공예배시 회중에 참여시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아직 분별력이 있지 않아 자기고백에 의한 입교를 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언약의 자녀들이다. 공예배는 언약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이므로 유아세례 교인들이 그 언약의 예배에 참여하여 축복을 누리며 말씀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맨처음, 장로회(당회)에서 행하는 부모의 문답을 거쳐 공예배 시간에 교회 앞에서 유아세례를 받는 것은 그 이후로 계속 공예배에 참여해야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며 교회 앞에서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부모나 성인인 모든 성도들은 유아세례 교인의 신성한 권리를 박탈할 수 없으며 그들의 의무를 자의로 해제할 수 없다.
(3) 지교회의 공예배와 보편교회의 관계
공예배는 지교회가 개별적으로 결정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즉 각 지교회가 임의적으로 그 공예배를 없앤다든지 의미자체를 변경할 수 없다. 주일 오후 찬양모임이나 수요일 기도회 등이 각 교회의 개별적 프로그램일 수 있는 것과 비교되는 개념이다. 공예배는 전체보편교회를 기억하는 언약적 관계 속에 드려지는 예배이다. 이 공예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세계 가운데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들이 상호관계 속에서 서로를 기억하게 된다.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선배들과 동일한 신앙을 추구하며 고백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교회에 속한 모든 교회들은 지금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경배하는 것이다.
지상에는 서로 알지 못하는 형제, 자매들이 전 세계의 상이한 문화여건 아래서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개별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우리와 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의 끈으로 엮어져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공예배는 주님으로 인해 세워진 보편교회에 대한 인식 가운데 드려져야 하는 것이다.
3. 공예배와 직분적 참여
(1) 직분과 공예배
직분은 공예배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회의 직분을 일상적으로 ‘일하는 직분’으로 고착시키고 있는 경향이 있다. 즉 직분이 예배를 위한 직분임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은 기본적으로 예배를 수종드는 기능을 한다. 교회의 모든 은사와 직분들은 예배를 통해 표현된다. 이 의미는 음악이나 예술 등 일반 재능의 쓰임새를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여러 은사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공예배를 통해 통합적으로 그 의미가 발생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은사, 사랑의 은사,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통역의 은사 등이 모두 공예배의 의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시대에 방언이나 예언, 통역의 은사가 더 이상 예배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그 의미는 여전히 그 가운데 살아있는 것이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는 회중교회나 오순절교회와는 달리 공예배의 직분적 질서와 순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공예배 시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일시적 감정에 의해 자유롭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직분과 은사에 따라 엄숙한 예배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2) 목사
말씀을 맡은 교사로서 목사는 공예배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자이다. 그는 공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텍스트인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목사는 말씀이 선포되어져야 하는 엄중한 시간에 자기 목적이나 윤리적 교훈을 주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목사는 말씀을 맡은 자로서 성례를 집례(봉사)하게 된다. 그는 장로회의 결정에 따라 세례를 베풀고, 성찬의 의미를 교사로서 확인하는 가운데 공예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목사가 성례를 집행할 때는 전체 교회가 온전히 함께 참여하도록 하는 감독을 겸한다. 목사가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것은 개인의 권한이 아니라 교회가 맡긴 직분이다. 예배에 수종드는 직분의 출처는 곧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어떤 경우에도 교회(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자가 될 수 없다. 도리어 목사 직분을 통해 섬기는 자인 것이다.
(3) 장로
장로는 말씀선포에 대한 선한 감독자로서의 직분자이다. 즉 장로는 말씀의 감독자이다.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가 본의 아니게 자의적으로 설교를 한다거나 말씀에 대한 해석을 잘못 할 경우 장로들은 나중 그것을 함께 되살펴 볼 수 있어야 하며 그런 과정을 통해 말씀의 이탈을 방지하게 되는 것이다.
공예배에서 목사의 설교는 목사의 단독행위가 아니다. 거기에는 장로가 말씀의 감독자로서 그 설교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목사는 개별적 의향대로 설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설교는 목사에게 단독으로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장로회의 공동책임 영역인 것이다.
또한 장로는 성례식의 수종자이다. 성례의 의미는 선포되는 말씀과 직결된다. 성례에는 아무나 참석하지 못한다. 신앙이 없는 자가 성례에 참여한다든지 징계 중에 있는 자는 성찬에 참여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장로는 선한 감독의 직분을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장로는 권징사역에 참여하게 된다. 말씀을 맡은 자인 목사가 선포하는 말씀에 따라 사는지 모든 성도들을 감독해야할 의무가 장로에게 있는 것이다. 원래 ‘심방’은 장로들의 직분적 사역인데 심방을 통해 성도들이 선포된 말씀의 원리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 항상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공예배를 통해 선포된 말씀과 거룩한 성례에 참여한 자로서 살아야 하며, 장로는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그런 삶을 살도록 독려하는 직분자인 것이다. 만일 말씀과 성례의 정신대로 살지 않는 성도들이 있을 경우 장로회에 보고해야 하며 장로회는 기도 중 그 성도를 권면하기도 하고 그 권면을 듣지 않으면 공적인 권징을 해야 하는 것이다.
(4) 집사
집사가 공예배에 직분으로 참여할 때는 일반적으로 순번을 정해 참여한다. 이는 목사나 장로가 예배중 직분을 이행할 때와 마찬가지다. 한 지교회에 목사가 여러 명 있을 경우 돌아가며 말씀을 선포하고 장로가 여러 명 있을 때 돌아가며 공기도를 하는 것과 같다. 공예배 참여에 있어서, 집사의 직분 가운데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연보순서에 참여하는 것이다. 집사들은 성도들이 연보를 할 때 그 순서를 돕는데 그것은 집사의 직분적 봉사이다. 성도들이 삶의 고백으로 공예배를 통한 연보에 참여할 때 집사들은 그 절차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할 때 적절한 자리에 안내하는 것도 집사들의 봉사영역에 속한다.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아이와 함께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에게는 예배도중 방해받지 않도록 적절한 자리배정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예배를 위한 집사의 직분은 성도 중 예배에 온전히 참여치 못하는 성도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성도가 졸음을 이기지 못해 어려워한다거나 정신이 산만하게 되어 예배에 집중하지 못할 때 저들을 일깨워 예배에 바르게 참여하도록 도움을 주게 된다. 또한 예배도중 어린이들이 떠들 경우에도 집사들은 권면하여 전체 예배시간의 경건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봉사할 수 있다.
4. 공예배의 형식과 내용
개혁주의교회에서는 예배순서를 공적인 일로 이해하고 있다. 1618년-1619년의 도르트 총회는 ‘예배순서’를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여, 예배순서 그 자체가 외부세계에 ‘개혁교회’의 성격을 드러내기 때문에 교회의 공적인 문서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므로 장로교에서는 일반적으로 공예배에, [준비, 묵도, 찬양, 연보, 성찬, 말씀선포, 신앙고백, 권징사역, 축도]로 구성된다. 이 글에서는 공예배의 구체적인 순서보다, 더욱 본질적이라 할 수 있는 그 내용과 의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한다.
(1) 준비: 평균케 하는 기도
공예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루어지는 개별적 준비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성도들은 공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교회당에 도착했을 때 머리를 조아려 기도하게 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교회당에 들어가면 머리 숙이고 기도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즉 공예배를 앞두고 개인기도를 하는 의미와 다른 모임이나 텅 빈 예배당에서 개별적으로 기도하는 의미가 동일하지 않다.
성도들은 세상에 살면서 각기 다른 생활환경 가운데 처해 있다. 다양한 직업, 교육수준의 정도, 빈부의 격차 등 세상 사람들이 가늠하는 정도가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들은 소위 좋은 직업을 가지거나 학벌이 좋아 존경받는가 하면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삶을 사는가 하면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궁핍하게 사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성도들은 건강하기도 하며 다른 어떤 성도들은 병약하기도 하다. 세상에서는 그들의 그런 외적인 형편에 따라 사람을 해석하며 부러워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즉 성도들 또한 세상에서의 삶은 천차만별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세상의 모든 지위나 정도는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동일하다. 성도들이 공예배에 참여하기 전 하나님께 드리는 개별적 기도는 ‘평균케 하는 기도’인 것이다. 이는 곧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보편교회에 속한 성도들과 곧 있게 될 지교회의 공예배를 기억하는 가운데 행해지는 준비의 기도이다. 그러므로 공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은 세상 가운데 살면서 가지게 된 죄들을 떨쳐버리는 회개의 기도를 동반하게 되는 것이다.
(2) 묵도와 응답: ‘하나됨’의 확인
공예배를 시작하는 초두에 모임에 참여한 온 성도들이 함께 묵도함으로 시작하는 것은 ‘교회의 하나됨’을 확인하는 기도이다. 올바른 묵도에 참여하는 것은 공예배의 기초라 할 수 있다. 묵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거룩한 보편교회를 기억하며 기도로 예배참여를 고백하게 되는데, 공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사역에 참여하는 고백적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배를 앞두고 단순히 마음을 가다듬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예배를 인도하는 성도(목사)는 전체 성도들의 묵도와 더불어 시편을 통해 공적인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묵도에 이어 성경구절을 낭독하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3) 찬양
여기서 찬양은 음악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아름다운 음성이나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상은 거룩한 피로 값 주고 사신 택함을 받은 자기 백성이다.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는 성경의 시편으로 노래한다. 인간의 재능이나 예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편을 통해 하나님을 노래함으로써 경배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경우 대개 시편 및 성경 속에 있는 구절들로 구성된 교독문(찬양시)이 사용되고 있다. 교독문은 찬송가 뒤에 부록처럼 붙어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에 대한 이유를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교독문이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교독문이 곧 찬송(찬양)이라는 의미이다. 대개의 찬송가가 신앙인들의 시(詩)에 곡조를 단 형태로 수록되어 있는데 반해, 교독문은 곡조가 있지 않은 채 시편을 비롯한 성경본문을 그대로 수록하고 있다. 이는 교독문이 완벽한 찬양임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독문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점들이 있다. 이는 교독문에 수록된 시편에는 전체 시편들 중 지극히 일부분만 선택하고 있다는 점과, 시편을 누군가가 편의에 따라 재구성했다는 점이다. 시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시편이 골고루 찬양시로 노래되어야 한다. 즉 인간의 판단에 따라 고정적으로 선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로 쓰여진 시를 다시금 재편집한다는 것은 전혀 자연스럽지 못하다. 즉 다윗의 시 일부와 모세의 시 일부를 적절하게 뒤섞어 재편집한 채로 공예배 시간에 교독한다는 것은 원래의 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공예배를 통해 온전한 찬양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흠이 없는 온전한 찬송(찬양)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말씀 속에 존재한다. 칼빈의 입장에서 본다면 공예배 시간에는 시편과 성경구절들을 노래함으로써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찬송가는 공예배 이외의 모임시간에 부르면 좋을 것이다.
(4) 공적인 기도
공예배 시간에 드려지는 기도는 개인의 간구가 아니라 보편교회 가운데서 드려지는 공적인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 기도는 모든 공교회가 함께 참여할 수 있을만한 공교회적인 기도여야 한다. 보편교회에 속한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교회라 할지라도 말씀 안에서 공감하게 되는 그런 기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기억한다. 공예배 가운데서 공적인 기도를 하는 성도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범위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사사로운 개인 혹은 지교회의 목적이나 문제에 지나치게 얽매여 기도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공예배 중의 공기도에는 미사여구가 필요치 않다. 그리고 길게 오래하는 기도가 올바르고 바람직한 기도인 것은 아니다. 나아가 개인적 간절함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의 간절함이 기도 속에 마땅히 배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개별적 성향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장로교에서는 원칙적으로 공예배 시간의 공기도를 감독자인 장로들이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장로가 특별한 권위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감독의 직분을 맡은 자가 공적 책임성 있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이다.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언약과 은혜 가운데 드려지는 공기도를 통해 온 세계에 흩어진 보편교회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동일한 고백과 감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5) 연보
공예배 시간에 하는 연보는 단순히 돈을 거두는 것(collection)이 아니며, 단순한 기부금(gift)이 아니다. 나아가 그 연보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offering)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삶의 고백(confession)이다. 우리는 주기도문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에 대해 공예배에서의 연보를 통해 고백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는 날마다의 삶이 주님께 달려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날마다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건강, 재능, 기회 등을 통해 얻은 수입으로 세상에 살 동안 육신적 생명의 근원이 되는 식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주일 공예배시 연보에 참여하는 것은 그런 의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예배 시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연보에는 구약의 십일조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우리시대의 십일조 연보뿐 아니라 공예배 시간에 드려지는 모든 연보에 구약의 십일조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연보를 통해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하게 되며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로 살고 있음을 교회 앞에 공적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십일조 연보는 구약의 율법적 개념과는 다르다. 구약의 십일조가 의무적 세금인데 반해 신약의 십일조는 자발적 은혜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구약의 의무가, 신약의 자발적 참여 보다 강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약의 은혜로 인한 자발적 참여가 율법적 의무보다 훨씬 강도 높은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공예배를 통해 고백적으로 이루어지는 주일 연보에 참여하는 것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반화되어 있는 감사연보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아야할 내용들이 많다. 하나님께 감사할 제목이 있을 때 꼭 돈이 결부되어야 감사의 표현이 우세하다는 생각으로 고착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나아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감사함’을 느끼는 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언약적 감사가 아니라 확증 없는 세속적 획득성 감사일 가능성이 높다. 연보는 감사한 삶의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감사의 표현이 돈으로 결부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공예배 시간의 연보를 통해 평균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
(6) 성례: 세례와 성찬의 나눔
세례는 교회 앞에서 이루어지는 세상에 대한 죽음의 공개적 선언이다. 그 세례는 세례를 받고자 하는 자의 개인적 결단 때문이 아니라 감독회(장로회, 당회)의 판단과 보증에 따라 교회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인 성도들은 일생에 한 차례 세례를 받게 되지만 그 의미는 공예배를 통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세례를 베풂에 있어서 말씀을 맡은 목사가 세례를 집례하고 장로들은 문답을 통해 그 세례받는 자의 신앙에 대한 감독자와 보증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은 세례 받는 자에 대한 공적인 증인이 된다. 그리고 회중 앞에서의 세례식을 통해 이미 세례를 받은 성도들도 그 세례에 참여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어야 한다. 즉 세례는 단회적이지만 공예배를 통한 세례의 의미는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성찬을 나눌 때 우리는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고 마신다. 떡과 포도주는 성도의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다. 공예배시 나누어지는 떡과 포도주는 공적 의미를 지닌다. 즉 보편교회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지교회의 성례인 것이다. 그 떡과 포도주와 무관한 사람에게는 참 생명이 공급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예배를 통해 나누는 성찬은 참 생명과 직결된다.
우리는 자칫 그 떡과 포도주를 가져와 내가 먹고 마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그 떡과 포도주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당하다. 이는 성도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연합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대형교회 가운데서 성도들 사이에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말씀의 교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찬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리고 떡(카스테라 등)을 사전에 조그맣게 잘라서 하나씩 집어먹는 것은 다시금 검증되어야 할 전통이다.
성찬을 나눔에 있어서 떡과 포도주의 의미는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눈으로 보며 참여하는 의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한 덩어리 떡과 한 주전자에 담긴 포도주를 성도들이 떼어먹고 나누어 마시는 것을 눈으로 확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게 된다. 세례 받은 성도들이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영적인 의미상 예수 그리스도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그의 몸속에 들어감으로써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진정한 일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7) 말씀 선포
공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 선포이다. 비록 교회가 세운 교사인 목사가 설교를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선포이다. 이는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에게 특별한 권한이 주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가운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모든 성도들은 공히 예배 가운데 선포되는 말씀에 참여한다. 목사, 장로, 집사 그리고 일반 성도들이 예외 없이 모두 말씀에 참여한다. 심지어는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유아세례 교인들도 그 언약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참여한다. 설교자인 목사는 말씀을 전하는 자일 뿐 아니라 그 말씀에 참여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목사는 선포하는 자임과 동시에 그 선포에 성도들과 함께 참여해야 하는 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 것과 같다.
목사는 말씀선포에 있어서 자의적일 수 없다. 즉 교회의 원래적 뜻과 보편교회의 의사 가운데서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설교 본문을 선정하는 것도 설교자 개인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되며, 교회의 뜻 혹은 장로회의 의사 가운데 선정되어야 한다. 매주일 이 본문 저 본문을 자의로 선택하게 되면 교회가 목회자의 개별적 성향이나 의도에 따라 움직여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시대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매 주일 행해지는 설교본문과 설교내용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예배를 위해 말씀을 묵상하거나 준비하는 일이 강조될 필요가 없음으로 인해 점차적으로 말씀에 무지해져 갈 수 밖에 없었다. 종교개혁 시대 이후부터는 설교자가 자유롭게 성경본문을 정해 말씀을 선포했으며 설교내용도 각 설교자에 따라 자유롭게 준비되었다. 초기에는 말씀의 교훈에 따라 생동감 있는 말씀선포가 이루어졌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설교자의 개성이나 성향에 의한 본문선택이 이루어지고 설교됨으로써 일관성 있는 보편교회로서의 말씀 선포가 아니라 설교자의 개인적 판단에 의존하는 부정적인 면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교회들 가운데 상이한 메시지와 다양한 주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문제점을 어느 정도 극복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성경본문 선택이나 말씀선포 내용에 있어서 자의적 판단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말씀을 선포할 때 보편교회의 뜻에 따라 말씀 자체를 해석해야 하며 개별인간이 설교문을 재구성할 때 따를 수 있는 위험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설교를 함에 있어서 자기 목적을 가지거나 윤리적 교훈을 추구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다.
(8) 공동의 고백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는 전통에 따라 사도신경을 고백으로 채택해 오고 있다. 공예배를 통해 전체 성도들이 함께 입술을 통해 신앙을 고백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이를 통해 모든 성도들이 동일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신경이 공예배 시간을 통해 공적으로 고백되어지는 것은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에서 그 공동고백의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거룩한 공회’란 전세계에 흩어진 ‘보편교회’에 함께 참여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며,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보편교회에서의 ‘성도의 교제’ 가운데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지 교회 성도들 가운데 발생하는 의미이지만 전체 보편교회에 속한 지교회 성도들의 의미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성도의 교통’(communio sanctorum)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통한 거룩한 교제이며 단순한 친교(fellowship)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공예배를 통해 입술로써 공동의 고백을 하는 것은 보편교회 속의 지교회, 그리고 지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있음을 언약 가운데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공예배를 통한 ‘거룩한 하나됨’의 고백이다.
(9) 권징사역
공예배시간에 권징사역의 절차가 있는 것은 삶의 고백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과 주님의 몸된 교회의 거룩함을 배우기 위함이다. 이는 교회의 순결한 모습을 공예배 가운데 확인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 권면이나 징계를 하는 시간이 아니어도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권징을 공예배의 요소로 두고 있다. 권징사역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교훈을, 장로회의 의사에 따라 말씀을 맡은 교사인 목사를 통해 듣게 되는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사안이나 특정한 성도에 대한 권면이나 징계를 해야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예배시간을 통해 공적으로 권징을 행함으로써 예배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이 그 권징사역으로 말미암는 교훈에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권징사역의 기초는 선포된 말씀을 배경으로 한 장로들의 감독과 성도들 간의 ‘상호 보살핌’에 있다. 이는 성도들에 대한 삶의 교육과 심방에 연관되는 개념이다. 장로가 각 성도들을 심방하는 것은 교인관리가 아니라 그들을 영적으로 보살피기 위해서이다. 일상생활에 관련된 일들도 함께 보살펴지는 것은 그것이 영적인 삶과 직접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예배 시간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권징사역은 보편교회에 대한 지교회의 책무이기도 하다.
(10) 축도(benediction)의 의미
축도는 원칙적으로 공예배 때 말씀을 맡은 목사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언약이다. 축도는 단순한 축복기도가 아니다. 교인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는 기도행위가 아닌 것이다. 만일 축도를 축복기도로 이해하면서 목사만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다고 하게 되면 하나의 특권이 형성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목사를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중재인(medium)으로 오인할 소지를 남기게 된다.
목사만 축도를 할 수 있다고 해서 목사가 아무데서나 자기 마음대로 축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축도는 말씀을 맡은 자가 공예배를 통해 교회 앞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공적으로 선포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다. 개혁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축도가 공예배에서만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한국교회에서 축도가 남발되는 것은 축도를 축복기도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축복기도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결혼식과 장례식, 위임식, 연합예배 등에서 축도를 하게 되며 심지어는 회갑연이나 생일축하연, 개업식 등에서 까지 축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개혁교회에서는 신학교의 입학식이나 졸업식 심지어는 노회나 총회의 개회 예배시에도 축도를 하지 않는다. 그런 예배는 보편교회를 기억하며 주일에 드려지는 언약 속 공예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교회의 공예배 이외의 상시적인 일반집회에서는 축도를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주일 오후 집회나 수요모임, 금요모임, 그리고 새벽기도회 등에서는 축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정말 늘 축복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면 모든 집회 때마다 하면 되겠지만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음은 아직도 그 원래의 정신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 남아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축도는 축복기도가 아님으로 미사여구를 섞어 길게 늘여나갈 성질이 아니며 목사의 개인적 바램이나 의사를 섞어서도 안 된다. 일반적으로는 고린도후서 13:13이나 민수기 6:24-26의 말씀을 그대로 축도에 사용한다. 축도의 핵심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언약적 소망을 주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의 공예배 가운데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누리는 것이다.
6. 결론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주님의 몸된 보편교회에 속한 지교회들에서 온전한 공예배가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우리시대는 보편교회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 채 단절된 개교회주의가 팽배하다. 이는 특히 공예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보편교회에 속한 지교회로서의 보편적인 공예배보다는 특별한 이미지를 통한 예배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는 교회들이 많이 있음은 심각한 일이다. 그들은 그것이 마치 교회성장을 위한 경쟁력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인위성을 배제한 말씀선포와 말씀에 따른 성례와 순종, 그리고 진정한 고백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편교회에 속한 교회들은 말씀과 직분의 질서 가운데 하나님을 경배해야함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이를 위해 공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예배에 대한 성숙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공예배는 개별적 만족이나 즐거움을 위해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다. 즉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소위 자신이 ‘은혜’를 받느냐에 따라 좋은 예배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은혜를 주관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동일한 예배에 참여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았다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공예배에 참여할 때 몸과 입술로 고백하며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배한다. 공예배는 말씀선포에 대한 청종과 성도의 고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외에 인위적인 절차와 노력들은 도리어 위험할 수 있다.
성도들은 공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예배를 시작하며 드려지는 묵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새기며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구체적으로 듣는다. 그리고 기록된 성경으로부터 드러난 말씀선포를 통해 교회에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하게 된다. 성도들은 시편으로 하나님을 노래함으로써 그에게 경배를 드린다.
공기도는 예배시간마다 서로 돌아가면서 하는 개별적 기도가 아니라 교회의 기도이다. 교회의 공적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의 유기적인 삶을 알아야 하며 말씀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공예배 시간을 통해 드리는 연보는 단순히 물질을 내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바치는 성물(聖物)도 아니다. 그것은 성도의 삶과 생명에 대한 고백이다.
공예배 시간의 권징사역을 통해서도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운다.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삶이나 행위가 온당하지 못함을 확인하며 그의 뜻에 청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온 성도들이 함께 입술로 신앙고백을 하는 것으로써 주님 안에서 하나임을 확인한다. 공예배시에 이루어지는 성례는 하나님에 대한 교회로서의 고백이다. 모든 성도들은 세례를 통해 세상에 대해 죽은 자신을 고백하게 되며 성찬을 나눔으로써 주님만이 참 생명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 모든 것 위에 더해지는 축도는 생명력 넘치는 진정한 언약의 축복이다.
자유주의, 세속주의, 신비주의적 불건전한 요소들이 침투하여 교회들을 어지럽히는 우리의 시대다. 이러한 때 참된 공예배를 회복함으로써 보편교회에 속한 지교회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때가 속히 오기를 원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공예배를 회복해야함에 대해 지나친 형식주의라 비난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언약의 하나님께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자신의 몸된 교회를 어떻게 인도해 가시는지 눈여겨보며 그의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인다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공예배의 의미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게 되리라 믿는다. 언약과 질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자세가 중요할 것이다. (국제신학, 제4권, 2002.12).
공예배의 회복
이광호 목사
1. 서론
우리 시대에 들어와 예배에 대한 본질적인 개념이 많이 흐려졌다.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어도 개인적 열정과 정성이 깃든 예배라면 그것이 좋은 예배라 하기도 한다. 예배에 참여하는 자가 감격을 느끼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워 하는 것이다. 나아가 각종 악기를 동원한 ‘행사형’ 예배방식이 유행하여 사람들을 끌기도 한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어 많이 모이기만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예배를 인도하는 많은 목사들은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뜻보다는 회중의 흥미를 유발하려는 노력을 쏟아 붓는다. 그 결과 설교자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선포가 아니라 대중적 감화에 역점을 두게 되어 강단이 허물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 시대에 생겨나기 시작한 대형 교회들에서는 성례의 진정한 의미가 사라졌다. 세례와 성찬의 참된 의미와 나눔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지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서로 알지 못하여 성도들 상호간 믿음의 관계 속에 있지 않다면 참다운 공예배가 드려질 수 없다.
보편교회에 속한 모든 하나님의 참된 교회들은 상호 유기적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개교회 혹은 개체교회라는 의미를 강하게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는 단일한 우주적 교회에 속한 지(支)교회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개체 교회라 했을 때 각 교회는 개체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것 처럼 오해하게 될 여지가 남는다. 그러나 지교회라 했을 때 그 의미는 한 둥치에 붙어 있는 ‘가지’ 교회로서의 보편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성경에는 포도나무 비유, 무화과나무 비유, 감람나무 비유 등 많은 비유들이 나오는데 모든 가지들이 한 나무둥치에 붙어있듯이 보편교회의 의미도 이와 동일한 개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도 개별성도나 지교회는 원리상 자의적 판단을 할 수 없다. 보편교회에 속한 지교회로서 보편적 질서 가운데 이루어지는 공예배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한 주일 가운데 안식 후 첫날을 주일(主日)로 정해 공예배를 드리기 원하신다.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구약의 율법적 언약을 이루어 구속을 완성하신 날이다. 그 날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완성과 택하신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특별히 그 날을 주일로 정해 공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공예배는 보편적 질서와 직분적 기능 속에서 드려져야 한다. 그냥 성도들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며, 그 가운데 설교가 있으면 그것이 공예배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예배 가운데는 마땅히 있어야할 내용들이 있으며 공교회적 질서에 따라 예배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공예배는 개별적 성향에 따라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며, 모든 사적인 예배나 비공적인 예배는 매주일 행해지는 ‘공예배’의 의미 아래서 그 예배의 의미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2. 예배의 의미와 범위
(1) 공예배의 의미
공예배란 무엇인가? 모든 성도들은 매 주일마다 자발적 신앙으로 인한 결과로써 선한 의무감을 가지고 각 지교회로 모여 하나님을 경배한다. 우리가 이해해야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신부로서 전체적인 교회가 구원받은 영혼으로서의 개인 보다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각 개인들이 모여 공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기보다 개별 성도들이 공예배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경배함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공예배는 보편교회 가운데 이루어지는 언약적 예배이다. 이를 한국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대예배’라 칭한다. 주일 날 지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공예배의 요건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공예배이다. 주일 오후나 밤에 모이는 예배는 사실상 성도들을 위한 성경공부나 교육을 위한 시간으로 보면 옳을 것이다. 그 시간에는 성경을 공부할 수 있을 것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대소요리문답,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등을 공부함으로써 성도들을 교육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시간은 결국 온전한 공예배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공예배란 교회가 공적으로 결의한 예배모임이라는 말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공적인 결의를 통해 모이는 모임은 주일 대예배 이외에 주일 오후 혹은 저녁 모임이 있다. 그리고 수요일 밤 모임이 있다. 그리고 교회에 따라서는 금요일 저녁에 모여 기도회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모임은 ‘공예배’라는 의미와는 다른 개념이다. 공예배란 온 성도가 함께 모여 공적인 예배의 내용과 절차 및 형식을 갖춘 예배인 것이다.
신약시대의 주일은 언약적 개념을 가지며, 보편교회는 그 주일에 이루어지는 공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한다. 근래에는 주 5일 근무제로 인해 주일예배를 다른 요일로 변경하려는 일부 교회들의 움직임이 있으나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실 역사 가운데서도 종교개혁자들은 일요일의 우상화를 우려해 주일(主日)을 다른 요일로 바꾸어야 할 만큼 심각한 지적을 한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게된 배경에는 복음을 떠난 비기독교적 영향에 대한 반동적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2) 지교회의 예배참여 범위
공예배에는 지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입교인들은 물론이며, 유아세례교인들 역시 마땅히 참여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경우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이들이 입교를 하기전 까지는 공예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듯 일반화 되어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유아세례 교인을 공예배시 회중에 참여시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아직 분별력이 있지 않아 자기고백에 의한 입교를 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언약의 자녀들이다. 공예배는 언약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이므로 유아세례 교인들이 그 언약의 예배에 참여하여 축복을 누리며 말씀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맨처음, 장로회(당회)에서 행하는 부모의 문답을 거쳐 공예배 시간에 교회 앞에서 유아세례를 받는 것은 그 이후로 계속 공예배에 참여해야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며 교회 앞에서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부모나 성인인 모든 성도들은 유아세례 교인의 신성한 권리를 박탈할 수 없으며 그들의 의무를 자의로 해제할 수 없다.
(3) 지교회의 공예배와 보편교회의 관계
공예배는 지교회가 개별적으로 결정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즉 각 지교회가 임의적으로 그 공예배를 없앤다든지 의미자체를 변경할 수 없다. 주일 오후 찬양모임이나 수요일 기도회 등이 각 교회의 개별적 프로그램일 수 있는 것과 비교되는 개념이다. 공예배는 전체보편교회를 기억하는 언약적 관계 속에 드려지는 예배이다. 이 공예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세계 가운데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들이 상호관계 속에서 서로를 기억하게 된다.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선배들과 동일한 신앙을 추구하며 고백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교회에 속한 모든 교회들은 지금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경배하는 것이다.
지상에는 서로 알지 못하는 형제, 자매들이 전 세계의 상이한 문화여건 아래서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개별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우리와 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의 끈으로 엮어져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공예배는 주님으로 인해 세워진 보편교회에 대한 인식 가운데 드려져야 하는 것이다.
3. 공예배와 직분적 참여
(1) 직분과 공예배
직분은 공예배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회의 직분을 일상적으로 ‘일하는 직분’으로 고착시키고 있는 경향이 있다. 즉 직분이 예배를 위한 직분임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은 기본적으로 예배를 수종드는 기능을 한다. 교회의 모든 은사와 직분들은 예배를 통해 표현된다. 이 의미는 음악이나 예술 등 일반 재능의 쓰임새를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여러 은사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공예배를 통해 통합적으로 그 의미가 발생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은사, 사랑의 은사,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통역의 은사 등이 모두 공예배의 의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시대에 방언이나 예언, 통역의 은사가 더 이상 예배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그 의미는 여전히 그 가운데 살아있는 것이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는 회중교회나 오순절교회와는 달리 공예배의 직분적 질서와 순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공예배 시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일시적 감정에 의해 자유롭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직분과 은사에 따라 엄숙한 예배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2) 목사
말씀을 맡은 교사로서 목사는 공예배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자이다. 그는 공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텍스트인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목사는 말씀이 선포되어져야 하는 엄중한 시간에 자기 목적이나 윤리적 교훈을 주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목사는 말씀을 맡은 자로서 성례를 집례(봉사)하게 된다. 그는 장로회의 결정에 따라 세례를 베풀고, 성찬의 의미를 교사로서 확인하는 가운데 공예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목사가 성례를 집행할 때는 전체 교회가 온전히 함께 참여하도록 하는 감독을 겸한다. 목사가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것은 개인의 권한이 아니라 교회가 맡긴 직분이다. 예배에 수종드는 직분의 출처는 곧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어떤 경우에도 교회(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자가 될 수 없다. 도리어 목사 직분을 통해 섬기는 자인 것이다.
(3) 장로
장로는 말씀선포에 대한 선한 감독자로서의 직분자이다. 즉 장로는 말씀의 감독자이다.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가 본의 아니게 자의적으로 설교를 한다거나 말씀에 대한 해석을 잘못 할 경우 장로들은 나중 그것을 함께 되살펴 볼 수 있어야 하며 그런 과정을 통해 말씀의 이탈을 방지하게 되는 것이다.
공예배에서 목사의 설교는 목사의 단독행위가 아니다. 거기에는 장로가 말씀의 감독자로서 그 설교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목사는 개별적 의향대로 설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설교는 목사에게 단독으로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장로회의 공동책임 영역인 것이다.
또한 장로는 성례식의 수종자이다. 성례의 의미는 선포되는 말씀과 직결된다. 성례에는 아무나 참석하지 못한다. 신앙이 없는 자가 성례에 참여한다든지 징계 중에 있는 자는 성찬에 참여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장로는 선한 감독의 직분을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장로는 권징사역에 참여하게 된다. 말씀을 맡은 자인 목사가 선포하는 말씀에 따라 사는지 모든 성도들을 감독해야할 의무가 장로에게 있는 것이다. 원래 ‘심방’은 장로들의 직분적 사역인데 심방을 통해 성도들이 선포된 말씀의 원리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 항상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공예배를 통해 선포된 말씀과 거룩한 성례에 참여한 자로서 살아야 하며, 장로는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그런 삶을 살도록 독려하는 직분자인 것이다. 만일 말씀과 성례의 정신대로 살지 않는 성도들이 있을 경우 장로회에 보고해야 하며 장로회는 기도 중 그 성도를 권면하기도 하고 그 권면을 듣지 않으면 공적인 권징을 해야 하는 것이다.
(4) 집사
집사가 공예배에 직분으로 참여할 때는 일반적으로 순번을 정해 참여한다. 이는 목사나 장로가 예배중 직분을 이행할 때와 마찬가지다. 한 지교회에 목사가 여러 명 있을 경우 돌아가며 말씀을 선포하고 장로가 여러 명 있을 때 돌아가며 공기도를 하는 것과 같다. 공예배 참여에 있어서, 집사의 직분 가운데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연보순서에 참여하는 것이다. 집사들은 성도들이 연보를 할 때 그 순서를 돕는데 그것은 집사의 직분적 봉사이다. 성도들이 삶의 고백으로 공예배를 통한 연보에 참여할 때 집사들은 그 절차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할 때 적절한 자리에 안내하는 것도 집사들의 봉사영역에 속한다.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아이와 함께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에게는 예배도중 방해받지 않도록 적절한 자리배정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예배를 위한 집사의 직분은 성도 중 예배에 온전히 참여치 못하는 성도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성도가 졸음을 이기지 못해 어려워한다거나 정신이 산만하게 되어 예배에 집중하지 못할 때 저들을 일깨워 예배에 바르게 참여하도록 도움을 주게 된다. 또한 예배도중 어린이들이 떠들 경우에도 집사들은 권면하여 전체 예배시간의 경건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봉사할 수 있다.
4. 공예배의 형식과 내용
개혁주의교회에서는 예배순서를 공적인 일로 이해하고 있다. 1618년-1619년의 도르트 총회는 ‘예배순서’를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여, 예배순서 그 자체가 외부세계에 ‘개혁교회’의 성격을 드러내기 때문에 교회의 공적인 문서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므로 장로교에서는 일반적으로 공예배에, [준비, 묵도, 찬양, 연보, 성찬, 말씀선포, 신앙고백, 권징사역, 축도]로 구성된다. 이 글에서는 공예배의 구체적인 순서보다, 더욱 본질적이라 할 수 있는 그 내용과 의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한다.
(1) 준비: 평균케 하는 기도
공예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루어지는 개별적 준비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성도들은 공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교회당에 도착했을 때 머리를 조아려 기도하게 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교회당에 들어가면 머리 숙이고 기도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즉 공예배를 앞두고 개인기도를 하는 의미와 다른 모임이나 텅 빈 예배당에서 개별적으로 기도하는 의미가 동일하지 않다.
성도들은 세상에 살면서 각기 다른 생활환경 가운데 처해 있다. 다양한 직업, 교육수준의 정도, 빈부의 격차 등 세상 사람들이 가늠하는 정도가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들은 소위 좋은 직업을 가지거나 학벌이 좋아 존경받는가 하면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삶을 사는가 하면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궁핍하게 사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성도들은 건강하기도 하며 다른 어떤 성도들은 병약하기도 하다. 세상에서는 그들의 그런 외적인 형편에 따라 사람을 해석하며 부러워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즉 성도들 또한 세상에서의 삶은 천차만별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세상의 모든 지위나 정도는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동일하다. 성도들이 공예배에 참여하기 전 하나님께 드리는 개별적 기도는 ‘평균케 하는 기도’인 것이다. 이는 곧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보편교회에 속한 성도들과 곧 있게 될 지교회의 공예배를 기억하는 가운데 행해지는 준비의 기도이다. 그러므로 공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은 세상 가운데 살면서 가지게 된 죄들을 떨쳐버리는 회개의 기도를 동반하게 되는 것이다.
(2) 묵도와 응답: ‘하나됨’의 확인
공예배를 시작하는 초두에 모임에 참여한 온 성도들이 함께 묵도함으로 시작하는 것은 ‘교회의 하나됨’을 확인하는 기도이다. 올바른 묵도에 참여하는 것은 공예배의 기초라 할 수 있다. 묵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거룩한 보편교회를 기억하며 기도로 예배참여를 고백하게 되는데, 공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사역에 참여하는 고백적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배를 앞두고 단순히 마음을 가다듬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예배를 인도하는 성도(목사)는 전체 성도들의 묵도와 더불어 시편을 통해 공적인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묵도에 이어 성경구절을 낭독하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3) 찬양
여기서 찬양은 음악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아름다운 음성이나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상은 거룩한 피로 값 주고 사신 택함을 받은 자기 백성이다.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는 성경의 시편으로 노래한다. 인간의 재능이나 예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편을 통해 하나님을 노래함으로써 경배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경우 대개 시편 및 성경 속에 있는 구절들로 구성된 교독문(찬양시)이 사용되고 있다. 교독문은 찬송가 뒤에 부록처럼 붙어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에 대한 이유를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교독문이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교독문이 곧 찬송(찬양)이라는 의미이다. 대개의 찬송가가 신앙인들의 시(詩)에 곡조를 단 형태로 수록되어 있는데 반해, 교독문은 곡조가 있지 않은 채 시편을 비롯한 성경본문을 그대로 수록하고 있다. 이는 교독문이 완벽한 찬양임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독문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점들이 있다. 이는 교독문에 수록된 시편에는 전체 시편들 중 지극히 일부분만 선택하고 있다는 점과, 시편을 누군가가 편의에 따라 재구성했다는 점이다. 시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시편이 골고루 찬양시로 노래되어야 한다. 즉 인간의 판단에 따라 고정적으로 선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로 쓰여진 시를 다시금 재편집한다는 것은 전혀 자연스럽지 못하다. 즉 다윗의 시 일부와 모세의 시 일부를 적절하게 뒤섞어 재편집한 채로 공예배 시간에 교독한다는 것은 원래의 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공예배를 통해 온전한 찬양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흠이 없는 온전한 찬송(찬양)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말씀 속에 존재한다. 칼빈의 입장에서 본다면 공예배 시간에는 시편과 성경구절들을 노래함으로써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찬송가는 공예배 이외의 모임시간에 부르면 좋을 것이다.
(4) 공적인 기도
공예배 시간에 드려지는 기도는 개인의 간구가 아니라 보편교회 가운데서 드려지는 공적인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 기도는 모든 공교회가 함께 참여할 수 있을만한 공교회적인 기도여야 한다. 보편교회에 속한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교회라 할지라도 말씀 안에서 공감하게 되는 그런 기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기억한다. 공예배 가운데서 공적인 기도를 하는 성도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범위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사사로운 개인 혹은 지교회의 목적이나 문제에 지나치게 얽매여 기도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공예배 중의 공기도에는 미사여구가 필요치 않다. 그리고 길게 오래하는 기도가 올바르고 바람직한 기도인 것은 아니다. 나아가 개인적 간절함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의 간절함이 기도 속에 마땅히 배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개별적 성향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장로교에서는 원칙적으로 공예배 시간의 공기도를 감독자인 장로들이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장로가 특별한 권위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감독의 직분을 맡은 자가 공적 책임성 있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이다.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언약과 은혜 가운데 드려지는 공기도를 통해 온 세계에 흩어진 보편교회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동일한 고백과 감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5) 연보
공예배 시간에 하는 연보는 단순히 돈을 거두는 것(collection)이 아니며, 단순한 기부금(gift)이 아니다. 나아가 그 연보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offering)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삶의 고백(confession)이다. 우리는 주기도문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에 대해 공예배에서의 연보를 통해 고백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는 날마다의 삶이 주님께 달려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날마다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건강, 재능, 기회 등을 통해 얻은 수입으로 세상에 살 동안 육신적 생명의 근원이 되는 식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주일 공예배시 연보에 참여하는 것은 그런 의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예배 시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연보에는 구약의 십일조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우리시대의 십일조 연보뿐 아니라 공예배 시간에 드려지는 모든 연보에 구약의 십일조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연보를 통해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하게 되며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로 살고 있음을 교회 앞에 공적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십일조 연보는 구약의 율법적 개념과는 다르다. 구약의 십일조가 의무적 세금인데 반해 신약의 십일조는 자발적 은혜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구약의 의무가, 신약의 자발적 참여 보다 강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약의 은혜로 인한 자발적 참여가 율법적 의무보다 훨씬 강도 높은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공예배를 통해 고백적으로 이루어지는 주일 연보에 참여하는 것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반화되어 있는 감사연보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아야할 내용들이 많다. 하나님께 감사할 제목이 있을 때 꼭 돈이 결부되어야 감사의 표현이 우세하다는 생각으로 고착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나아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감사함’을 느끼는 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언약적 감사가 아니라 확증 없는 세속적 획득성 감사일 가능성이 높다. 연보는 감사한 삶의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감사의 표현이 돈으로 결부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공예배 시간의 연보를 통해 평균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
(6) 성례: 세례와 성찬의 나눔
세례는 교회 앞에서 이루어지는 세상에 대한 죽음의 공개적 선언이다. 그 세례는 세례를 받고자 하는 자의 개인적 결단 때문이 아니라 감독회(장로회, 당회)의 판단과 보증에 따라 교회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인 성도들은 일생에 한 차례 세례를 받게 되지만 그 의미는 공예배를 통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세례를 베풂에 있어서 말씀을 맡은 목사가 세례를 집례하고 장로들은 문답을 통해 그 세례받는 자의 신앙에 대한 감독자와 보증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은 세례 받는 자에 대한 공적인 증인이 된다. 그리고 회중 앞에서의 세례식을 통해 이미 세례를 받은 성도들도 그 세례에 참여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어야 한다. 즉 세례는 단회적이지만 공예배를 통한 세례의 의미는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성찬을 나눌 때 우리는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고 마신다. 떡과 포도주는 성도의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다. 공예배시 나누어지는 떡과 포도주는 공적 의미를 지닌다. 즉 보편교회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지교회의 성례인 것이다. 그 떡과 포도주와 무관한 사람에게는 참 생명이 공급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예배를 통해 나누는 성찬은 참 생명과 직결된다.
우리는 자칫 그 떡과 포도주를 가져와 내가 먹고 마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그 떡과 포도주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당하다. 이는 성도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연합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대형교회 가운데서 성도들 사이에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말씀의 교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찬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리고 떡(카스테라 등)을 사전에 조그맣게 잘라서 하나씩 집어먹는 것은 다시금 검증되어야 할 전통이다.
성찬을 나눔에 있어서 떡과 포도주의 의미는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눈으로 보며 참여하는 의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한 덩어리 떡과 한 주전자에 담긴 포도주를 성도들이 떼어먹고 나누어 마시는 것을 눈으로 확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게 된다. 세례 받은 성도들이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영적인 의미상 예수 그리스도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그의 몸속에 들어감으로써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진정한 일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7) 말씀 선포
공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 선포이다. 비록 교회가 세운 교사인 목사가 설교를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선포이다. 이는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에게 특별한 권한이 주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가운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모든 성도들은 공히 예배 가운데 선포되는 말씀에 참여한다. 목사, 장로, 집사 그리고 일반 성도들이 예외 없이 모두 말씀에 참여한다. 심지어는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유아세례 교인들도 그 언약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참여한다. 설교자인 목사는 말씀을 전하는 자일 뿐 아니라 그 말씀에 참여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목사는 선포하는 자임과 동시에 그 선포에 성도들과 함께 참여해야 하는 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 것과 같다.
목사는 말씀선포에 있어서 자의적일 수 없다. 즉 교회의 원래적 뜻과 보편교회의 의사 가운데서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설교 본문을 선정하는 것도 설교자 개인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되며, 교회의 뜻 혹은 장로회의 의사 가운데 선정되어야 한다. 매주일 이 본문 저 본문을 자의로 선택하게 되면 교회가 목회자의 개별적 성향이나 의도에 따라 움직여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시대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매 주일 행해지는 설교본문과 설교내용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예배를 위해 말씀을 묵상하거나 준비하는 일이 강조될 필요가 없음으로 인해 점차적으로 말씀에 무지해져 갈 수 밖에 없었다. 종교개혁 시대 이후부터는 설교자가 자유롭게 성경본문을 정해 말씀을 선포했으며 설교내용도 각 설교자에 따라 자유롭게 준비되었다. 초기에는 말씀의 교훈에 따라 생동감 있는 말씀선포가 이루어졌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설교자의 개성이나 성향에 의한 본문선택이 이루어지고 설교됨으로써 일관성 있는 보편교회로서의 말씀 선포가 아니라 설교자의 개인적 판단에 의존하는 부정적인 면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교회들 가운데 상이한 메시지와 다양한 주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문제점을 어느 정도 극복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성경본문 선택이나 말씀선포 내용에 있어서 자의적 판단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말씀을 선포할 때 보편교회의 뜻에 따라 말씀 자체를 해석해야 하며 개별인간이 설교문을 재구성할 때 따를 수 있는 위험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설교를 함에 있어서 자기 목적을 가지거나 윤리적 교훈을 추구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다.
(8) 공동의 고백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는 전통에 따라 사도신경을 고백으로 채택해 오고 있다. 공예배를 통해 전체 성도들이 함께 입술을 통해 신앙을 고백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이를 통해 모든 성도들이 동일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신경이 공예배 시간을 통해 공적으로 고백되어지는 것은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에서 그 공동고백의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거룩한 공회’란 전세계에 흩어진 ‘보편교회’에 함께 참여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며,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보편교회에서의 ‘성도의 교제’ 가운데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지 교회 성도들 가운데 발생하는 의미이지만 전체 보편교회에 속한 지교회 성도들의 의미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성도의 교통’(communio sanctorum)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통한 거룩한 교제이며 단순한 친교(fellowship)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공예배를 통해 입술로써 공동의 고백을 하는 것은 보편교회 속의 지교회, 그리고 지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있음을 언약 가운데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공예배를 통한 ‘거룩한 하나됨’의 고백이다.
(9) 권징사역
공예배시간에 권징사역의 절차가 있는 것은 삶의 고백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과 주님의 몸된 교회의 거룩함을 배우기 위함이다. 이는 교회의 순결한 모습을 공예배 가운데 확인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 권면이나 징계를 하는 시간이 아니어도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권징을 공예배의 요소로 두고 있다. 권징사역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교훈을, 장로회의 의사에 따라 말씀을 맡은 교사인 목사를 통해 듣게 되는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사안이나 특정한 성도에 대한 권면이나 징계를 해야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예배시간을 통해 공적으로 권징을 행함으로써 예배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이 그 권징사역으로 말미암는 교훈에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권징사역의 기초는 선포된 말씀을 배경으로 한 장로들의 감독과 성도들 간의 ‘상호 보살핌’에 있다. 이는 성도들에 대한 삶의 교육과 심방에 연관되는 개념이다. 장로가 각 성도들을 심방하는 것은 교인관리가 아니라 그들을 영적으로 보살피기 위해서이다. 일상생활에 관련된 일들도 함께 보살펴지는 것은 그것이 영적인 삶과 직접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예배 시간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권징사역은 보편교회에 대한 지교회의 책무이기도 하다.
(10) 축도(benediction)의 의미
축도는 원칙적으로 공예배 때 말씀을 맡은 목사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언약이다. 축도는 단순한 축복기도가 아니다. 교인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는 기도행위가 아닌 것이다. 만일 축도를 축복기도로 이해하면서 목사만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다고 하게 되면 하나의 특권이 형성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목사를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중재인(medium)으로 오인할 소지를 남기게 된다.
목사만 축도를 할 수 있다고 해서 목사가 아무데서나 자기 마음대로 축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축도는 말씀을 맡은 자가 공예배를 통해 교회 앞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공적으로 선포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다. 개혁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축도가 공예배에서만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한국교회에서 축도가 남발되는 것은 축도를 축복기도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축복기도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결혼식과 장례식, 위임식, 연합예배 등에서 축도를 하게 되며 심지어는 회갑연이나 생일축하연, 개업식 등에서 까지 축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개혁교회에서는 신학교의 입학식이나 졸업식 심지어는 노회나 총회의 개회 예배시에도 축도를 하지 않는다. 그런 예배는 보편교회를 기억하며 주일에 드려지는 언약 속 공예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교회의 공예배 이외의 상시적인 일반집회에서는 축도를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주일 오후 집회나 수요모임, 금요모임, 그리고 새벽기도회 등에서는 축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정말 늘 축복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면 모든 집회 때마다 하면 되겠지만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음은 아직도 그 원래의 정신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 남아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축도는 축복기도가 아님으로 미사여구를 섞어 길게 늘여나갈 성질이 아니며 목사의 개인적 바램이나 의사를 섞어서도 안 된다. 일반적으로는 고린도후서 13:13이나 민수기 6:24-26의 말씀을 그대로 축도에 사용한다. 축도의 핵심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언약적 소망을 주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의 공예배 가운데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누리는 것이다.
6. 결론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주님의 몸된 보편교회에 속한 지교회들에서 온전한 공예배가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우리시대는 보편교회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 채 단절된 개교회주의가 팽배하다. 이는 특히 공예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보편교회에 속한 지교회로서의 보편적인 공예배보다는 특별한 이미지를 통한 예배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는 교회들이 많이 있음은 심각한 일이다. 그들은 그것이 마치 교회성장을 위한 경쟁력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인위성을 배제한 말씀선포와 말씀에 따른 성례와 순종, 그리고 진정한 고백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편교회에 속한 교회들은 말씀과 직분의 질서 가운데 하나님을 경배해야함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이를 위해 공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예배에 대한 성숙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공예배는 개별적 만족이나 즐거움을 위해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다. 즉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소위 자신이 ‘은혜’를 받느냐에 따라 좋은 예배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은혜를 주관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동일한 예배에 참여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았다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공예배에 참여할 때 몸과 입술로 고백하며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배한다. 공예배는 말씀선포에 대한 청종과 성도의 고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외에 인위적인 절차와 노력들은 도리어 위험할 수 있다.
성도들은 공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예배를 시작하며 드려지는 묵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새기며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구체적으로 듣는다. 그리고 기록된 성경으로부터 드러난 말씀선포를 통해 교회에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하게 된다. 성도들은 시편으로 하나님을 노래함으로써 그에게 경배를 드린다.
공기도는 예배시간마다 서로 돌아가면서 하는 개별적 기도가 아니라 교회의 기도이다. 교회의 공적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의 유기적인 삶을 알아야 하며 말씀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공예배 시간을 통해 드리는 연보는 단순히 물질을 내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바치는 성물(聖物)도 아니다. 그것은 성도의 삶과 생명에 대한 고백이다.
공예배 시간의 권징사역을 통해서도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운다.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삶이나 행위가 온당하지 못함을 확인하며 그의 뜻에 청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온 성도들이 함께 입술로 신앙고백을 하는 것으로써 주님 안에서 하나임을 확인한다. 공예배시에 이루어지는 성례는 하나님에 대한 교회로서의 고백이다. 모든 성도들은 세례를 통해 세상에 대해 죽은 자신을 고백하게 되며 성찬을 나눔으로써 주님만이 참 생명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 모든 것 위에 더해지는 축도는 생명력 넘치는 진정한 언약의 축복이다.
자유주의, 세속주의, 신비주의적 불건전한 요소들이 침투하여 교회들을 어지럽히는 우리의 시대다. 이러한 때 참된 공예배를 회복함으로써 보편교회에 속한 지교회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때가 속히 오기를 원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공예배를 회복해야함에 대해 지나친 형식주의라 비난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언약의 하나님께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자신의 몸된 교회를 어떻게 인도해 가시는지 눈여겨보며 그의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인다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공예배의 의미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게 되리라 믿는다. 언약과 질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자세가 중요할 것이다. (국제신학, 제4권, 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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