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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의 여성 사역의 문제에 대한 한 고찰

손재호 2011.10.19 13:51 조회 수 : 1882 추천:6

'교회에서의 여성 사역의 문제에 대한 한 고찰'  

                                          이승구 교수 /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회에서의 여성 사역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서 편집진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개혁 신학적 입장에서의 의견을 밝히는 글을 쓰도록 요청하였기에 이 문제에 대한 간단한 논의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사역”이라고 할 때 많은 이들은 목사와 장로로서의 사역을 중심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이런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서 필자 자신은 별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오히려 필자 자신은 “여성 사역” 이라는 말을 좀더 폭 넓게 생각해야 하고 그런 폭 넓은 의미의 여성 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교회 안에서 여성은 처음부터 중요하게 사역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 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때 생각하는 의도인 여성의 목사와 장로로서의 사역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이 논의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1.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출발점

   먼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각자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든 지를 차치(且置)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이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본질을 흐리게 하지 않는 건전한 논의가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논의해 가는 과정 가운데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논의와 심지어 감정적인 의견 표명과 의견의 대립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으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논의에서는 먼저 다음 몇 가지 점들을 분명히 하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우리의 논의가 진정 그리스도교적인 논의이려면 우리 모두가 함께 동의하고 출발해야 할 점들은 다음과 같은 점들이라고 여겨진다.

(1)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 볼 때 남자와 여자는 그 신분과 지위에 있어서 동등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 있어서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므로 후의 논의에서 이 점을 가지고 서로를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성 사역을 찬성하는 이들이 이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대해서 그렇게 보는 것은 여성을 평등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든지 하는 논의를 해서는 안 된다.)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 타락의 영향 하에서 서로가 투쟁하며 결과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게 되는 현상이 발생했으나(창 3:16), 그것은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기보다는 죄악의 결과요 죄에 대한 형벌의 한 부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상호 지배적이려고 하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주신 관계의 상황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 후의 논쟁에서 어떤 입장을 지니든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논의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여자가 어떤 점에서 부족한 점이 있어서 여성의 교회에서의 사역이 있을 수 없다는 식의 논의는 있어서도 안 되고, 그런 논의가 전개되어서도 안 된다. 신분과 지위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고 그 은사와 능력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남자 됨과 여자 됨에 따라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논의의 전제의 하나이다. 또한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의도는 남자와 여자가 각기 그들의 특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것이다. 돕는 배필의 의미가 “그에게 상응하는 돕는 자”임을 생각할 때 이 점은 매우 자명하다. 그래서 바울은 “주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전 11:11)라고 말하고 있다.

(2) 교회에서의 사역자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로서의 역할이 아닌 것이다. 신약 교회의 직임은 구약 교회의 직임과 직접적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직임들이 아니다. 구약의 직임들은 오실 메시아의 사역을 바라보게 하는 모형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으나 신약의 직임들은 구약의 직임과 직접적 연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온전한 선지자, 제사장, 왕직의 대리직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에서나 일부 성공회 등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대리하는 직임에 근거하여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은 이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논의를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것인데, 그리스도가 남성이었으므로 교회의 사역자는 남성이어야만 한다는 식의 논의는 선결 문제 오류를 지닌 잘못된 논의가 되는 것이다. 신약 교회의 직임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직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 교회의 직임은 그리스도 직임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면서 논의해야 한다.

(3) 신약의 선지자들이 있는 상황은 과도기적인 현상이었지, 선지자가 교회 안에 항상 있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신약의 선지자들 가운데서는 남자 선지자들과 함께 여선지자들이 있었다(행 21:9; 고전 11:5?). 그러나 그런 직분이 신약 교회에 지속적으로 있게 하지 않으신 것이다. 새로운 계시가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4)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순전히 성경이 항상 있을 교회의 모습을 향해 어떻게 말하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어져야 한다. 신약 성경이 교회 안에서의 사역에 대해서 빛을 비춰 주는 것이 우리의 최종적 판단 근거가 되는 것이다.

(5)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우리의 문화 현실이나 우리의 현실에 대한 요구로부터 도출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현실이 이 문제를 판단하는 준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서 교회 안에서 남자들과 똑 같이 교육받은 여성들이 차별 받고 있다는 현실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이끌게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 문화의 요구가 이 문제를 판단하는 준거가 되어서도 안 된다. 1세기 교회의 문화적 정황이 우리의 교회의 원칙을 규제하도록 해서도 안되고, 그와 반대로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이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좌지우지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오늘날에는 여성들의 참여가 사회 전반에 일반화되어졌으므로, 또한 교회 안에서는 여성이 더 많으므로 당연히 여성이 교회 안에서 중요한 직임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식의 오늘의 문화와 현실에 근거한 논의가 우리의 사유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신약 성경이 신약 교회의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이 우리의 최종적 판단 근거가 되어야 한다(sola scriptura!).

(6) 그렇기에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는 꼭 같이 교육받은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전도사나 교육부서 등에서 사역할 때 경제적 처분(예, 사례)에서나 존경받음에 있어서 남성들과 차별 받지 아니하도록 하는 모든 외적인 준비가 이루어져 나가야 한다는 것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해야 하고 이를 이루어 가기 위해서 함께 노력해 가야 한다.

(7)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성경의 규범적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다 순종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복종해야한다.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 하지 않는 것은 비성경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혹시 성경을 존중하면서 서로 달리 해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가 성경을 존중하는 태도를 확인 할 수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면서 서로 존중히 여기면서, 성경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에 대해서는 재미있게 토론하며 함께 하나님의 바른 뜻이 어떤 것인지를 추구하여 가야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서로 인신 비방하거나 서로를 이단시하는 태도로 발전되어 가서는 안 된다. 물론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한 비판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려고 하면서 그 성경의 가장 바른 뜻이 어떤 것인지를 함께 찾아가는 동료 해석자들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귀히 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강조하자면, 우리의 모든 판단의 최종적 근거는 성경의 가르침이어야만 한다.

2. 이 문제에 대한 신약의 해당 구절과 그 의미

   그렇다면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논의를 하는 신약 성경의 구절이 있는 지를 확인해야 한다. 먼저 이 논의와 관련해서 많이 언급되는데 실상 여성의 교회 사역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구절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첫째로, 고린도전서 11:2-16절의 맥락을 잘 살펴보면 그 본문은 직접적으로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사역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 안에 있는 예언에 대한 언급은 당시에는 여선지자들이 아직까지 있었다는 것에 근거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언급에 근거해서 당시에 예배 가운데서 예언하는 여선지자가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오늘날도 교회 안에 그런 일을 하는 이들이 허용될 수 있으리라고 하는 것은 계시사의 발전에 유의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로, 고린도전서 14:34-36절도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사역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이는 예배 중에 소란스럽게 하거나, 특히 옆 사람에게 묻기 위해 말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바울이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 지니라”(고전 14:35)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보아야만 이 구절들에게 바울이 말하는 요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여성들이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서 예배가 소란스러워지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적당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는 권면의 한 부분으로 주어진 말씀으로 생각해야지, 이를 여성 사역에 대해 직접적 함의를 지닌 말씀으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 가운데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닌 구절은 디모데전서 2:9-14절의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는 그 맥락이 교회의 예배적 상황이라는 것은 바로 위에 있는 구절인 디모데전서 2:8절의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는데서 찾아 질 수 있다. 이는 각 가정에서 기도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기보다는 예배처에서의 의식적 기도 행위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예배적 맥락에서 여인들이 과연 어떻게 자신들을 치장할 것인지를 말하고(2:9-10), 이런 예배적 상황에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고 한 뒤(11절, 여기까지는 말씀은 고린도전서 14:34-36절의 의미와 상통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하고 있다(12절). 그러므로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목사와 장로로서의 사역에 대한 찬반 양론이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본격적 쟁점: “디모데 전서 2:12-14절을 과연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구절과 관련된 중요한 논점은 다음 세 가지 일 것이다. 첫째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12절)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둘째로, 이 금령은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 따른 1세기적 정황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주께서 오실 때까지의 상황 전체를 지배하는 것인가? 셋째로, 이 말씀을 바울의 글로 믿는 지, 아닌 지의 여부. 이 세 가지를 하나 하나 논의해 보기로 하자.

첫째,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12절)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 말의 표현 형태는 다른 곳에 사용된 용어들과 비교할 때 가르치는 것은 교회에서의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것과 연관된 것이고(딤전 1:3; 3:4; 4:11, 13, 16; 5:17; 6:3; 딤후 2:2, 24; 4:2), 따라서 다른 곳에서 “목사 즉 교사”(엡 4:11)라고 언급된 이들의 사역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주관하는 것”도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다스리는 것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는 다른 곳에서 “장로들”이라고 언급된 이들이 하는 사역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은 여자가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가르치는 직무인 목사의 역할을 하는 것과 다스리는 직무인 장로의 역할을 하는 것을 금하는 구절이라고 해석되는 것이다.

둘째, 이 금령은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 따른 1세기적 정황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주께서 오실 때까지의 상황을 지배하는 것인가? 만일에 1세기 정황에서의 이야기라면 이 말씀은 1세기 성도들에게는 구속력을 지니는 것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구속력이 없는 말씀인 것이 된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교회 모임과 관련하여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금령이(고전 11:2-16) 1세기 고린도 교인들에게만 적용되고 오늘 우리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과 같이, 디모데 전서의 이 금령도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금령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디모데 전서 2장의 본문이 12절로 마쳐지고 있다면 이와 같은 해석의 가능성도 상당히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에는 디모데 전서 2:13-14이 따라 붙어 있으므로 결코 그렇게 해석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 말씀의 인간 저자는 창조의 순서에 근거해서(12절), 그리고 타락의 순서의 근거해서(14절) 여자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며 주관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논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의 질서와 타락의 문제가 있는 상황 가운데서는 이는 계속 적용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 논의의 방식을 깨지 않는 한 우리는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창조의 질서가 계속되는 한, 교회에서는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12절)이 허락되지 않는다.

셋째, 이 말씀을 바울의 글로 믿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논의해 보기로 하자. 필자는 이 말씀을 바울 자신이 쓴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바른 해석이라고 여긴다. 본문 자체가 사도 바울이(딤전 1:1; 1:13; 2:7) 디모데에게(1:2, 18; 6:20) 구체적인 정황 가운데(딤전 1:3) 있는 그에게 목회의 지침을 주기 위해 기록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1세기 정황에서 사도의 이름을 빌어 바울의 제자격 되는 존재가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이 오늘날과 같이 위조나 이름 도용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당대의 관습적인 관례였다는 설명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백 번 양보해서 혹시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그 인간 저자가 이 글을 쓰는데 성령께서 영감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렇다면 위의 논의에 의해서 이는 오늘 우리를 규제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이 부분의 인간 저자가 누구이든지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교회에서는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12절)을 허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렇게 논의하시는 분들은 과연 만일 이것이 바울이 친히 쓴 것이라면 이 말씀을 따라서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런 논의를 하는 것인가? 혹시 이 말씀에 따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들을 이 말씀은 바울이 쓴 글이 아니라는 해석에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닌지를 묻고 싶다).

3.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사역 문제를 다루는 유일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디모데전서 2:12-14절에 근거해서 판단할 때 여자가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목사직)과 다스리고 주관하는 일을 하는 장로직은 허락되지 않았고,이 구절의 내포에 따라 그것은 창조의 질서가 존재하는 한 지속되는 교훈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이 있는 한 우리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교회 안에서 목사직과 장로직을 여성에게 허락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 폭 넓은 의미의 여성 사역은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고 격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약의 가르침에 우리가 복종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이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열등하다는 생각에서 그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순전히 성경이 지시하는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하는 마음에서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사역에 대해서, 그것도 목사직과 장로직에 대해서만 이런 금령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여성이 가르치는 것을 이 성경은 금하지 않는다. 또 다른 사회적 맥락에서 여성이 주관하는 자와 치리하는 자와 재판하는 자가 되는 것을 이 성경은 금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이 잘 다스릴 수 있는 은사가 있다면 다른 사회의 영역에서 그와 부합한 하는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또한 여성이 잘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면 이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잘 가르치는 일을 효과적으로 해야 할 것이고, 그리스도인 여성이 그리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2:12-14절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주해가 유지될 수 있다면 교회의 맥락에서는 여성이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목사직을 수행하는 것과 다스리는 장로직을 수행하는 것이 허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은 집사직에 대해서는 여성이 그 집사직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로마서 16:1과 디모데전서 3:11에 대한 주해를 참조할 때도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것은 그 자체로 또 깊은 주해적 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

   또한 고래로부터 칼빈을 비롯한 많은 개혁신학자들도 여성의 집사직은 허용적인 태도를 가져 왔다. 이는 집사직이 목사직이나 장로 직에 비해 낮은 직임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교회의 모든 직임의 평등성은 장로교회의 큰 가르침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장로교 헌법에 허용하지 않고 있을 때는 총회에서의 연구와 논의를 거쳐서 수정된 후에야 시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목사와 장로로서의 사역 가능성의 문제는 디모데전서 2:12-14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부디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에 충실해서 이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한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되든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근자의 논의 중에서 가장 성경적이며 개혁파적 전통에 충실하며 이 글의 입장과 가장 유사한 논의로 Edmund Clowney, The Church(Leicester: IVP, 1995), 제 15장의 논의를 참조하라. 또한 이와 가까우면서도 집사직도 여성이 감당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논의로는 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Tennessee: Thomas Nelson, 1998), 제 23장 각주 9, 10을 보라.